소설 <정류장의 흔적> 5화
그에게 주어졌던 3개월간의 고민 기한도 끝이 다가오고, 그가 이 마을에 버스기사로 돌아온 이후 두 번째로 맞이하는 명절도 눈앞이다. 마을이 활기를 띈 척이라도 할 수 있는 유일한 시기이다. 그는 명절에 자신의 가족과 함께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버스 운행을 자처했다.
그녀는 지난 명절 때 마을을 떠나지 않고 자신의 일상을 지켰었다. 이번 명절 또한 마찬가지이다. 마을의 노인들은 어린 가족들에게 어떠한 것이든 말을 해주고 싶어 한다. 이야기를 통해 그들을 안심시키고, 자신을 증명하고자 한다. 이번 명절 주요한 화두는 역시나 그녀이다. 도로는 평소보다 세 배나 되는 자동차들을 감당하고 있고, 버스 또한 마찬가지이다. 버스 안에서는 계속해서 그녀와 관련된 이야기가 돌고 있다. 그녀가 버스 안에 있든, 정류장에 있든, 아예 보이지 않든 그들은 그녀에 관한 말을 쉬지 않는다. 비교적 자신들과 가까운 나이의 여자에 관한 이야기에 젊은 부부들은 몇 년 만에 처음으로 노인들의 말에 관심을 갖는다. 지난 명절 자신에 관한 이야기만을 들었던 그는 그것에서 해방된 것에 부정하고 싶은 안도감을 느낀다. 그녀는 이번에도 그들이 원하는 모르는 척을 보여준다. 그는 그녀를 도와주고 싶다. 하지만 그럴 경우 그의 존재감이 과도하게 상승할 것이고, 지난 명절과 같은 부끄러움을 다시 느끼게 될 것이다. 그는 그것만은 피하고 싶다.
그런데 그녀를 위한 구원이 상상하지 못한 곳에서 온다. 어른들은 그녀에 관한 이야기를 자신들끼리 독점한다. 그들의 아이들은 그 대화에서 배제된다. 그로 인해 아이들은 그녀에 관해서 빈 공간을 갖게 된다. 그리고 그 빈 공간을 자신들의 상상력으로 채워 넣는다. 명절 첫 째날 오전, 아이들은 그녀가 그림 그리는 모습을 본다. 오후, 그들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 자신들이 본 것을 서로 공유한다. 그들에게 정류장에 그림을 그리는 성인 여성의 모습은 모험심을 자극하는 장면이다. 24번 버스의 3번째 운행이 끝나갈 때쯤, 아이들은 모험단을 구성하는 것을 끝내고 그날의 정류장으로 향한다. 그러한 모험단이 마을 곳곳에서 구성되어 3개의 모험단, 총 20명 가까이 되는 아이들이 모인다. 그리고 그들의 손에는 갖가지 색칠용품들이 들려져 있다.
정류장으로 가는 길에 마주친 모험단들은 서로에게 경쟁심을 느낀다. 반드시 자신들이 먼저 그녀와 상호작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가는 길에 경쟁의 규칙을 정한다.
최근의 그녀는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다. 그녀에 관해서 수군거리는 것은 요즘 항상 있는 일이니 차치하더라도, 명절이라서 그런 것인지 며칠째 어느 누구도 정류장에 새로운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계속해서 그녀의 환상이 빈약해져 간다. 새로운 그림이 환상의 빈틈을 채워줘야만 하는데 그것이 며칠째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오늘도 새로운 그림이 전혀 그려지지 않은 것을 확인한 그녀는 터덜터덜 오늘의 정류장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녀는 평소와 다른 이상함을 느낀다. 정류장에 아이들이 가득한 것이다. 초등학교 앞과 아이들의 놀이터로 쓰이는 들판 앞의 정류장을 제외하고 이런 적은 처음이다. 정류장 안에 앉을 곳이 없어 그녀는 정류장 밖에 서서 버스를 기다린다. 아이들은 계속해서 그녀를 힐끔힐끔 쳐다보고, 그 시선을 느낀 그녀 또한 그 아이들을 힐끔힐끔 쳐다본다. 그녀의 눈에 아이들이 두 손 가득 품고 있는 색연필이 들어온다. 그것을 본 그녀의 생각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그녀의 표정이 예상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러한 그녀의 표정이 아이들의 모험심을 더 자극한 것 같다. 아이들의 경쟁심에 기름이 부어졌다. 그들은 마침내 행동에 나선다. 각자의 모험단을 대표하는 3명의 아이들이 그녀 앞에 선다. 그들은 그녀 앞에 각자의 색연필을 내민다. 나머지 아이들은 정류장 안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고 그녀의 행동을 긴장하면서 기다린다. 그녀는 그것을 한참이나 쳐다보다가 3명의 아이들이 내민 3개의 각기 다른 색연필을 한꺼번에 손에 쥔다.
아이들은 예상치 못한 선택에 당황하며 각자의 색연필을 그녀에게서 뺏고 직접 규칙을 알려준다.
“이 중에서 한 개의 색연필만 골라야 돼요!”
다시 한 번 세 명의 아이에게서 세 개의 색연필이 내밀어진다. 그녀는 아이들의 경쟁을 무시할 생각이 전혀 없다. 새삼 진지한 표정이 되어 어떤 색연필을 골라야 하는지 고민한다. 빨간색, 파란색, 노란색의 색연필이 그녀의 눈앞에 있다. 그녀는 선택을 하기 전에 아이들이 가득한 정류장 안으로 걸어간다. 그리고는 그곳에 그려져 있는 그림들을 하나하나 천천히 살펴본다. 이 정류장에는 그녀가 그린 토마토, 꽃, 나비가 있다. 거기에 오늘 추가한 구름이 있다. 그리고 그 주변으로 그가 그린 벌, 태양, 도저히 알아볼 수 없는 식물 하나가 있다. 사람이 많이 오지 않는 정류장이라 그녀와 그가 그린 그림이 전부다. 그녀는 항상 이 정류장이 허전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정류장 구석구석을 열심히 살펴보는 그녀를 아이들은 존경 어린 시선으로 쳐다본다.
모든 그림들을 자세히 살펴본 그녀는 마침내 색연필 하나를 고른다. 그것은 노란색 색연필이다. 아이들의 희비가 엇갈린다. 노란색 색연필 모험단의 대표는 자랑스레 자신의 일원들을 돌아본다. 선택받지 못한 빨간색, 파란색 색연필 모험단은 이것 하나만으로 자신들이 패배했다고 인정하지 못한다. 승부를 이어가야 한다. 그녀의 관심을 어떻게든 자신 쪽으로 끌어와야 한다. 빨간색 색연필 모험단의 대표가 돌발행동을 한다. 그녀가 보는 바로 앞에서 정류장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을 본 파란색 색연필 모험단 대표는 깜짝 놀라질 수 없다는 듯 함께 그림을 그린다. 서로를 계속 의식하며 더 나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 자꾸만 그리던 그림 위에 선을 긋고 새로운 그림을 다시 시작한다. 정류장에 완성되지 못한 그림들이 늘어간다.
그녀는 한동안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고 그저 그들이 그림 그리는 모습을 지켜본다. 그녀의 소중한 정류장이 엉망인, 완성되지도 못한 그림들로 뒤덮이는 것을 참을 수 있는 것일까. 그 사이 자신의 대표에게만 가는 관심을 참지 못한 노란색 색연필 모험단의 한 아이는 그림 그리는 것에 동참하기로 한다. 이 아이는 거침이 없다. 다른 아이들의 그림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자신만의 그림을 망설임 없이 완성해 낸다. 묘하게 의인화된 정류장을 그린 그림이다. 어른이 보아도 알 수 없는 감탄을 느낄법한 기발한 그림이 완성되었다. 심지어 그녀의 그림들보다도 더 뛰어나 보인다. 그림을 그리고 있던 빨간색, 파란색 색연필 모험단의 대표들도 그 그림을 보고는 그리는 것을 멈춘다. 정류장 그림을 완성한 아이는 기대에 가득 차서 그녀를 올려다본다.
그녀는 웃는다. 그녀 특유의 밝음을 정류장 가득 채운다. 그림을 완성한 아이의 얼굴에도 그 밝음이 차오르고, 다른 아이들도 그것에 전염된다. 아이들은 신이 나서 그녀에게 다가가고 아이다운 질문들을 마구잡이로 그녀에게 던진다. 그녀는 그 질문들에 직접 답을 하지는 않지만, 그것을 대신해 아이들의 색연필을 하나씩 집어든다.
그리고는 완성되지 못한 그림들에 색연필을 갖다 댄다. 아이들이 자신의 능력을 입증하기 위해, 미완성작으로 남기기 위해, 자신의 무능력함을 가리기 위해 그었던 선들을 하나하나 잇는다. 빨간색 그림에는 파란색 색연필로, 파란색 그림에는 빨간색 색연필로. 다른 색을 지닌 선들이 하나하나 연결되어 모인다. 모인 지점에는 아이가 그린 뛰어난 정류장 그림이 위치한다. 이어진 선이 특별한 형체를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어떠한 예술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다른 사람이 이것을 보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 선을 잇는 모습을 직접 본 아이들에게는 다르다. 아이들은 극도의 행복감을 느낀다. 앞서 그림을 그린 세 명의 아이들뿐만 아니라 그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던 모든 아이들이 뛰어나와 정류장에 각자의 선을 긋는다. 그 선들은 모두 제각각이지만 연결된다. 아이들의 무규칙성 아래 정류장은 금세 선들로 가득 찬다. 빈 공간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가 된다. 정류장은 빨간색, 파란색, 노란색 선들로 뒤덮인다. 아이들의 모험은 성공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