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정류장의 흔적> 8화
그녀는 이 마을을 처음 본 순간 만족했다. 이 마을에는 어떠한 의미도 없는 것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건물, 논, 산 모든 것이 수십 년간 변화하지 않은 것 같았고, 마을사람들은 이미 오래전에 의미를 추구하는 것을 멈춘 것 같아 보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좋았던 것은 마을의 버스 정류장이었다. 분명 버스 정류장에는 너무나 명확한 의미가 있다. 버스를 기다리는 장소라는 유일하고 확실한 목적이 있다. 그러나 그녀가 처음 본 한밤중의 버스 정류장은 그러한 의미를 전혀 품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정류장에서 자신의 허무함을, 무의미함을 증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는 한동안 정류장에 존재했다. 아무런 목적 없이, 그저 존재했다.
마을에 집을 구하고, 한동안 그녀는 전에 없던 편안함을 느꼈다. 무의미함은 좋은 것이었다. 어떠한 갈등도 없었고 어떠한 부끄러움도 없었다. 아무도 없는 정류장은 그것을 매초, 매시간 증명해 주었다. 의미를 잃어버린 대상도 괜찮은 것이었다. 그녀는 존재하기 위한 최소한의 행동을 하는 시간을 제외하고 계속해서 정류장에 있었다. 누군가 몇 시간째 정류장에만 앉아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이상한 눈초리를 보내도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녀는 그런 것에 전혀 의미를 두지 않으니까. 아니 어떠한 것에도 의미를 두지 않으니까. 그녀는 그 어느 때보다 안정되었다. 이곳의 마을사람들은 의미를 갈구하기 위해 자신들끼리 갈등하지 않았고, 스스로의 의미를 찾기 위해 부끄러움을 무릅쓰지 않았다. 그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그들의 나이 듦이 부럽긴 하였지만, 그렇다고 젊음에도 그들과 비슷한 자신이 이상해 보이지는 않다고 그녀는 스스로 믿었다.
정류장에 그저 존재하기를 1주일, 그녀는 문득 정류장의 겉을 보았다. 년도-월-일이 작게 검은 글씨로 적혀있었다. 이 정류장이 만들어진 날짜를 기록한 것일까, 마지막으로 페인트칠을 한 날짜를 기록한 것일까. 그날은 지금으로부터 15년 전의 어느 날이었다. 그녀는 즉각적으로 이 흔적에 매혹되었다. 기록이 남은 당시, 특정한 의미를 띠고 있었을 흔적이 지금은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하고 있었다. 이 날이 무슨 날이든, 그것이 지금에 이르러서는 아무것도 아닌 그저 검은 숫자의 조합일 뿐이다. 당시 기록을 남긴 사람은 이 흔적을 절대 기억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고, 한 순간 흔적이 사라진다 하더라도 이 마을에 어떠한 영향도 끼치지 못할 것이다. 그녀는 이 무의미에 동참하고 싶어졌다. 그녀는 자신이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무언가를 날짜 밑에 그린다. 이 그림이 있다는 것을 사전에 알지 못한다면 절대 찾을 수 없을 정도의 그림이다. 그것이 무엇을 나타낸 건지 스스로 모르기에, 어떠한 사람이 이것을 보아도 해석할 수 없을 것이다. 해석한다는 것은 거짓이 될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첫 번째 흔적에 만족한다. 이 흔적이 마지막이 아닐 것이라는 사실을 그녀는 이미 알고 있다.
그날 이후 그녀의 일상은 새롭게 변화한다. 이 마을 전체에 걸쳐 자신의 무의미를 입증하고 싶어진다. 이 마을의 모든 정류장에 흔적을 남기기로 한다. 흔적을 남기기 위한 준비부터 시작이다. 그녀는 이 무의미를 허투루 대하고 싶지 않다. 마을의 한 초등학교 앞에 있는 문구사로 도구를 사러 간다. 이 문구사 또한 겉으로는 어떠한 의미도 추구하지 않는 것 같아 보인다. 아이들이 거의 없어진 초등학교 앞에서 문구사는 존재 이유를 잃어가는 중이다. 문을 열었지만 주인은 보이지 않는다. 그것에 감사하며 그녀가 도구들을 둘러보기를 한참, 마침내 문구사 안에 연결된 작은 방에서 주인이 음식 냄새와 함께 나온다. 문구사 주인은 그녀를 보고 과도해 보이는 이상한 반가움을 내비친다. 분명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이인데, 마을에서 오랜만에 본 젊은 여자라서 그런 것일까. 그녀가 그림 도구를 고르고 있는 모습을 본 주인이 다가온다. 주인은 신이 난 듯 그녀에게 이것저것 묻는다. 질문이 거듭될수록 이상하게 그녀를 치켜세우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주인은 그녀가 대단한 일을 하고 있는 것처럼, 할 것처럼 말하고 있다. 그녀가 마치 작은 시골로 귀향 온 천재 예술가라도 되는 것처럼 대하고 있다. 그녀는 주인 앞에서 자신을 이야기할 수가 없다. 거짓을 말하지는 않지만 진실 또한 말하지 않는다. 주인이 갖고 있는 환상을 깨뜨리면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그녀는 그 느낌을 굳이 거부하지 않는다. 주인의 환상을 지키기 위해 그녀는 생각보다 거창하게 도구들을 구매한다. 커다란 원통형의 화구통부터, 그 안을 빈틈없이 채울 수 있을 정도로 다양한 붓, 펜, 물감을 구매한다. 주인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흡족하게 바라본다. 문구사에서 떠날 때까지 주인은 그녀 주위를 벗어나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는 느낌을 준다. 흔적을 위한 도구들은 이제 모두 준비되었다.
그녀는 하루에 한 정류장씩 흔적을 남긴다. 매일 같은 시간, 집 앞의 같은 정류장에서 같은 버스를 타고 출발한다. 하루에 단 한 정류장씩만 전진해 가며 내린다. 그리고는 그날의 정류장에 매일 다른 흔적을 남긴다. 처음에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무언가를 그렸지만 갈수록 점점 현실의 무언가를 닮은 것을 그려 넣는다. 그렇게 그 정류장에 4시간쯤 존재한다. 아무런 목적 없이, 무의미를 느끼며 존재한다. 같은 버스를 한 차례 흘려보내고 두 번째로 버스가 돌아올 때 그것을 타서 집으로 돌아간다. 어떠한 갈등도, 어떠한 부끄러움도 없다.
마을 사람들은 점점 그녀에게 관심을 갖는다. 매일 같은 시간, 같은 버스를 항상 타고 있고, 항상 어떠한 정류장에 머무르고 있는 젊은 여성이기에 눈에 띌 수밖에 없다. 그녀 또한 그러한 노인들의 관심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에 아무런 의미를 두지 않는다. 그들이 자신과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기에. 그들과의 소통 또한 필요하지 않고, 무엇보다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들의 관심은 그녀도 자신들과 같은 사람인가 구분하는 과정에 지나지 않고, 그 구분이 완료되었을 때 관심 또한 자연스레 없어질 것이라고 그녀는 믿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