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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몰랐던 국민화가  

마이노리티 리포트와 간첩조작사건, 시스템의 결함은 바로 우리다

완전한 속물이 되기 전단계의 어릿한 기억이 있다. 담임선생님이 없는 자습시간이었다. 반장은 떠든 사람 김천석이라고 칠판에 미리 써 놓고 그를 주목했다. 속없는 녀석은 부당하다는 의식도 없는지 반장에게 따지기는커녕 바로 까불대고 떠들어 주며 악의적 예측을 그대로 시전 했다. 어쩌면 김천석은 본인의 이익을 배반하면서까지 친구들을 웃기고 싶어 했는지 모른다. 조무래기들 60명이 들어찬 '80년대 6학년의 교실에서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설정이 앞당겨 실현되고 있었다. ‘프리크라임’ 팀이 결성되어 범죄자가 죄를 저지르기도 전에 미리 범인을 색출해 낸다는 공상과학영화의 전제는 영화제작 훨씬 전부터, 내 눈앞에서 이토록 허술한 버전으로 실현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학교에 낼 돈을 부모로부터 받아오지 못해서 공개적으로 호된 망신을 당했고 누군가의 소지품이 없어지는 애매한 경우에도 호명되었다. 


실없는 웃음으로 한번 더 혼나기도 하면서 그는 주어진 불리한 역할에 적응해 나갔다. 천석이가 한 짓이 아니라는 것을 나를 포함한 다수가 인지하고 있었던 적도 많았다. 하지만, 굳이 손들고 그의 편을 들어 반박해 주려면 교실 가득한 집단적 공감대에 맞설 탄탄한 근거가 필요해 보였고 용기를 내지 못하는 사이에 이미 매질은 시작되었다. 계절이 바뀔 때쯤, 혼날 때에도 실실 웃고 있던 그의 얼굴에서 서서히 웃음기가 가시고 억울한 표정이 기본값으로 굳어져 갔다. 나는 무서웠고 미안했다. 비자발적 참여자이자 관찰자였던 모두가 강자와 약자 간 일방적 폭력성을 무의식적으로 수용하고 있었다. 그 녀석의 까만 몸에 회초리가 닿을 때마다 우리는 움찔하며 강자의 편으로 한 발짝 더 옮겨갔다.   


편견과 선입견은 통제의 장치로서 유용하다. 집단적 합의여서 강력하고 유리한 기억이어서 편리하다. 유용하고 편리한 만큼 권위자의 필요에 의해 꾸준히 소비된다. 그 공허한 내용성에도 불구하고 어느새 기정사실이 되는 것이다. 집이 가난하고 태도가 산만하고 공부에 취미가 없었던 초등학생의 몸에는 회초리가 소낙비처럼 내렸고 그는 교실 안에서 스스로 하찮아졌다. 하루 수십대의 매 중에서 몇 개가 부당한 매였는지 알 수 없는 세월이 무심히 흘러갔다. 올바르고 중요한 아이들이라는 유리한 역할을 맡았던 우리는, 그가 맞은 부당한 매만큼, 섬세하게 못되어지지 않았을까.  이응노의 일대기를 읽으면서 한 번도 불러본 적이 없는 그 이름이 떠올랐다.  

이응노는 천상 화가였다. 1904년 산천초목이 어우러진 충청도 시골에서 태어나 수묵화를 그렸고 집안의 반대에도 담벼락과 돌멩이, 바위 위에 화가의 꿈을 새겨 넣었다. 열아홉 살 상경하여 당대의 거장, 김규진 밑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서예와 문인화를 배웠고 간판장이로 생업을 벌여 수익을 내기도 했다. 일제가 주최하는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였고 일본으로 건너가 서양예술을 배우면서도 공모전에 당선되기를 거듭하며 순탄한 화업을 이어갔다. 해방 후에는 현장의 생생함을 담기 위해 거리로 나와 길거리 모습과 판자촌, 노동자들의 모습을 그렸고 한국전쟁이 터졌을 때 화가는 꼼짝없이 서울에 갇혔다. 비록 가난한 시골출신이지만 타고난 재능을 인정받는데 걸림돌이 없었던 그에게 날벼락같았던 불행은 서울수복 때 일어났다. 북진하던 인민군이 이응노의 아들을 끌고 가버린 것이다. 아들의 생사조차 알 수 없는 나날들이 강물처럼 흘러갔다.

한지 위에 그린 수묵화, 사군자부터 서양화법이 도입된 문자추상까지 다양한 스타일을 구사하는 이응노의 작품들을 보자면 두세 명의 작가가 나눠 그린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양적으로 질적으로 압도된다. 성과와 업적을 존경하는 것 이외에 내가 마음을 얹을 수 있는 인간적인 사연이 그에게 과연 있을까 싶었다. 언제나 그렇듯, 타인의 아픔은 나의 추측범위 바깥에 있다. 그의 미술사적 업적과 유럽에서의 인정과 명성은 권력자가 요리하기에 손쉬운 재료가 되어 그럴듯한 간첩몰이의 희생양으로 선정된 것이다.


이응노의 대표작품인 군상시리즈는 1980년부터 제작되었다. 클로즈업으로 보면 한 사람 한 사람 조금씩 다른 움직임으로 서 있지만 멀리에서 보면 우리는 거대한 움직임의 한 부분을 맡고 있는 비개성적 개인이다. 집단지성이든 집단감성이든 우리는 시대의 흐름 속에 존재함을 군상은 투영하고 있다. 이 흐름 속 한 구석에 김천석이나 나처럼 6학년의 작은 아이도 이응노 같은 걸출한 화가도 점처럼 박혀 꿈틀대는 것이 아닐까. 다만, 재능이 뛰어나지 않은 우리는 격동의 시기에 조금 더 안전했겠지. 군상은 광주민주화운동 시절, 광장으로 나온 개인들을 그린 것이었다. 독재의 폭압에 반대하는 5.18이 그에게 일면 위로를 주었을지 모르나 이응노를 위해 광장에 나와 항의한 사람들은 대부분 외국사람이었다는 점에 마음이 정지된다.

동백림 사건은 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김대중을 낙선시키기 위해 중앙정보부가 꾸며낸 조작극이었다. 프랑스와 독일, 스위스, 오스트리아 등 서구세계에서 주목받으며 세계적인 화가로 성장하고 있었고 후원인들이 열어준 동양미술학교에서 서양인들에게 지필묵이며 동양화를 가르치는 행보가 연일 신문을 도배하고 있었던 이응노는 여러 면에서 국민의 이목을 돌릴만한 월드스타였으며 요리하기 쉬운 재료였다. 1967년 어느 날, 동베를린에 오면 아들을 만나게 해 주겠다는 연락이 북한대사관을 통해 이응노에게 도달했다. 북한대사관을 두어 번 방문하는 동안 아들은 만날 수 없었다. 결국, 국민화가 이응노는, 북한의 돈을 받은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무기징역을 선고받는다. 권위자의 단정으로 소설도 팩트가 되었던 그 시절, 아까운 아티스트가 간첩이 된 지 십여 년 후, 비슷한 필요에 의해 김천석은 우리 반의 문제아이자 도둑이 되었다.

시공간을 조절할 수 없는 유한한 존재들에게 고통을 대신해 줄 타인의 희생은 공식적 가해보다 죄질이 무겁다. 우리는 김천석과 말을 섞는 일이 별로 없었고, 이응노는 서울의 모든 화랑으로부터 배척당했다. 입국금지상태였던 그는 프랑스 국적으로 해외에서 문자추상화가로 입지를 굳혔으나 고국의 문은 그가 사망하던 1989년까지 열리지 않았다. 그가 숨을 거두던 순간, 서울의 호암미술관에서는 회고전이 열리고 있었다. 그 많은 군상들이 그를 대신해 캔버스 속에서 바삐 움직이고 그 많은 문자들이 한 맺힌 춤을 추었을까.

억울한 상황에서 더 크게 웃으며 코믹하게 몸을 꼬며 매를 맞던 천석이가 과일장사로 꽤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우리가 준 상처가 좋은 손님들의 웃는 얼굴로 덮였기를 소심하게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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