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빠와 건건이 부딪히고 안 맞았다. 엄마랑은 무조건 좋았기 때문에 아빠와 조금 멀어도 그럭저럭 상쇄되었지만 속으로만 미워해도 겉으로 어떻게든 티가 났다. 마음 약한 아빠는 우리 사이가 별로일 때도 맛집을 찾아내서 모시고 가거나 옛날이야기를 '들어드리면' 그걸로 모든 걸 ‘반까이’ 해 주셨다. 엄마가 먼저 돌아가시고 아빠와 나만 남은 상상은 해 보질 못하던 좋은 시절이었다. 아빠와 나의 연결고리였던 엄마가 가시고 기댈 데가 없는 상태에서 아빠를 일식집으로 불러냈던 적이 있다. 그때 단둘이 저녁을 먹었던 룸에서 느낀 우리 둘의 어색하고 막막한 공기의 장르는 실존적 리얼리즘 정도 되려나. 엄마의 부재가 천만 픽셀의 화상도로 또렷해지는 순간들이었다.
엄마가 가신 뒤 1년 뒤쯤 그날도 엄마생각을 하다가 잠들었다. 자다가 마치 누가 깨운 것처럼 눈이 번쩍 뜨였는데 핸드폰이 혼자 뱅뱅 돌며 마구 흔들리고 있었다. 시간은 새벽 3시경, 발신자에는 “아빠”. 전화를 받아보니 어떤 모르는 목소리. 다급하게 아빠의 이름과 주민번호를 묻는다. 영락없는 보이스피싱이라고 생각했는데 정신을 다듬고 보니 119에서 온 전화였다. 아빠는 엄마가 돌아가신 집에서 새 아파트로 이사 가신 후 3주 만에 119를 부를 수밖에 없는 순간을 맞으셨다. 이름이 누구고 어디가 아프다는 말도 하기 전에 차에 타자마자 의식을 잃으셨고 119 요원이 아빠가 들고 탄 폰의 최신통화 하나씩을 누르다 내가 걸린 거였다. 살가운 아들과 며느리, 큰 언니, 작은 언니 내외 모두 나보다 더 최신통화였는데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고 눈을 뜬 건 나였다. 우연이었겠지만 우연이 아닌 걸로 생각이 드는 일이었다. 119 요원의 입장에서 우리 아빠는 무연고자였다는 사실과 많은 자식과 며느리 중에 하필 내가 보호자가 되었다는 사실이 기가 막혔다.
나는 발인을 다 하도록 제대로 울지도 못한 채 억울했다. 아빠와 싸울 게 더 남아있고, 내가 따질 것도 있는데 두 번의 암을 극복하고 완치 판정을 받은 아빠가 그렇게 빨리 일방적으로 모든 걸 종료할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웠던 아빠와의 관계는 이렇게 디엔드. 아빠라는 영화는 끝나고 긴긴 엔딩크레딧이 올라갔고 나는 강제로 갑자기 다른 세상에서 살게 되었다.
생은 함께 나눌 수 있는 것이지만 죽음이란 누군가와 나눌 수 없는 것임을 아빠는 알려주시고 가셨다. 가시고 나서 벌써 두 번째 봄, 섭섭했던 일들이 희미해지고 슬슬 때늦은 눈물이 장마처럼 흐른다. 아빠가 사랑했던 사람들을 찾아 만나고 울며 혼자만의 장례를 치를 수 밖에 없는시간들이다.
나혜석의 죽음도 무연고자로 신고되었다. 아빠처럼 아무와도 나눌 수 없는 마지막 시간을 맞았다. 그러나 맛있는 것을 사주는 자식은커녕 이혼 후에는 네 자식의 크는 모습을 보지도 못했고 말 많고 한 많은 세상에 당최 통하지 않을 것이 뻔한 글들을 이곳저곳에 실으며 쉽지 않은 목소리를 계속 내었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평화로운 길을 버리고 본인의 생각과 행동을 일치시키느라 외롭고 먼 가시밭 길을 자처한 셈이었다.
지금 읽어봐도 엔간한 배짱이 아니고는 그런 불편한 존재가 될 용기는 내지 못했을 것 같다. 3.1 운동으로 5개월이나 옥고를 치르고, 세상이 다 알 만한 연애를 하고, 연인의 사망으로 신경쇠약에 걸리고, 외교관 급 고위층 인사의 구애를 받아들여 결혼을 하고, 결혼 조건으로 시어머니와 별거를 보장할 것과 그림 일을 방해하지 말 것을 내세워 결혼을 하고 결혼 중 구미와 유럽 등 세계일주를 하며 당시 독립운동가와 사랑을 하고, 책 잡혀 이혼을 당하고, 남자는 첩을 둬도 되고 여자는 정조를 지켜야 하는 부당함과 억울함을 밝히는 이혼고백서를 써서 세상을 뒤집어 놓고, 정조란 취향일 뿐이라고 선언하는 등 시대의 공기를 감안하면 상상만 해도 무서워서 덜덜 떨릴 것 같은 과감한 행동을 그녀는 두려움 없이 해나갔다.
생각해 보면, 나는 비겁하게도 아빠라는 어려운 세상이 나를 받아 줄 수 있는 정도로만 대들고 반발하면서도 그렇게 행동하는 마음이 내내 불편한 걸 애써 외면했었다. 내 맘대로 직업을 바꾸고, 내가 하고 싶은 연애를 하고 헤어지고, 온 세상을 다 보고 이 나라 저 나라 돌아다니고, 갑자기 사업을 하기도 하고 접기도 했다. 엄마를 간호할 때는 아빠가 내게 고마워했고, 엄마가 가시고 나서는 예전보다는 평화로운 평행선을 긋게 되는 건가 싶던 차였다. 지금와서 생각하니, 나 또한 남달리 살게 되면 치르는 대가를 치렀지만 아빠도 남달리 엇나가는 딸을 둔 고통을 느꼈을 것 같다.
그 시대의 나혜석은 주변의 모든 사람과 이중 삼중으로 겹겹이 부딪혔으니 얼마나 외롭고 괴로웠을까. 근현대 한국사에서 여성의 몸으로 남과 다른 생각을 밝히고 행동한 댓가는 처절했다. 반발의 크기만큼 미움의 크기도 컸다. 당시 남녀를 막론하고 나혜석만큼 교육의 혜택을 누린 자도 드물었을 뿐 아니라 교육받은 기득권들은 대체로 겉으로 지향하는 바와 개인적으로 행동하는 바를 달리 살더라도 큰 피해가 없었다. 남성 뿐 아니라 여성들이 보는 나혜석도 전폭적으로 동의하기에는 극단적인 측면이 있었고 세상도 미술계도 그녀를 외면하고 내둘렀다. 세상과 어긋난 나혜석의 일대기와 직접 쓴 글들을 접하며 더없이 어둡고 괴로운 한 영혼을 만났으나 그녀가 그린 파리와 스페인 풍경화를 보며 살아생전에 개인전을 열고 모두가 선망하는 그림을 그리며 품었던 희망들을 만날 수 있었다.
당시의 조선인들은 볼 수 없는 서구의 선진세계를 직접 보았고 소회를 글과 그림으로 전했으며 동시대 조국의 모습을 통탄했고 더 나아지는데 앞장 서고자 이 말 저 말을 두려움없이 해 나갔고 과정에서 겪고 당한 것들을 일일이 기록함으로써 세상과 등을 졌다.
그녀의 질문은 영화 <헤어질 결심>의 대사와 비슷할 것 같다. 내가 그렇게 나쁩니까. 웬만한 남성에게도 없던 용기를 내 여자도 사람이라고 알리고 싶었던 20세기 최강의 여성캐릭터, 나혜석과 우리 사이에는 깊고 유연고한 한이 강물처럼 흐름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