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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릴 수 없는 말의 말

회한의 아티스트, 권진규의 들리지 않는 울음

나는 달릴 수 없는 말이 되고 말았다. 투자금은 더 이상 들어오지 않을 거라고 통보를 받았다. 조그만 회사의 초보사장에게 투자자가 한 약속은 그렇게나 가벼운 것이었다. 본인이 투자자임을 외부에 말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한 이유가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살면서 먹었던 밥 중에 가장 맛없는 밥을 먹고 쓴 술이 입에 당기던 시기였다. 철석같은 약속을 믿고 여기저기에 뿌려놓은 나의 계약들이 모두 위험해졌다. 원래 사장이 되면 슈퍼맨처럼 위기가 오더라도 침착하고 현명하게 163가지쯤의 해결책을 생각해 낼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나의 마음은 멈추고 얼어서 전혀 작동을 하지 않고 있었다. 모든 것을 일일이 느끼면 생존하는 데 어려움이 있겠다고 감지한 몸은 자동으로 마음부터 닫았다. 이미 사인된 중요한 계약의 잔금을 못 내게 되었다는 사실과 그동안 쌓아 올린 내 이름과 신용이 쓰레기통으로 갈 것이 뻔한 상황을 지켜보면서 다음 달 월급이 없다는 슬픔쯤은 가벼운 일이 되고 있었다.

돈의 결핍이 바로 인격의 결핍으로 이어지는 무겁고 어두운 상황이었다. 평범한 집안의 자녀가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총탄도 없이 전쟁터에 나갔다가 무기를 빼앗기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월급쟁이로 10년여의 경력을 쌓으며 아슬아슬하게 지켜오던 유리 자존심이 산산조각이 났다.  불 꺼진 사무실에 혼자 앉아서 내 인생이 끝도 없이 가라앉는 것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드라마에 나오는 사장들처럼 함께 일해나가는 사람들 앞에서 태연한 척 연기하지도 못했다. 앞으로 내가 처리해야 하는 일은 기름을 붓고 불 속으로 들어가는 일과 비슷하다는 생각으로 매일 밤 절망 과몰입 상태에 빠졌다.  헬멧도 쓰지 않고 자동차 사이를 질주하는 배달 오토바이 아저씨의 묘기대행진 같은 모습을 보며 눈물의 공감을 할 줄 몰랐다. 길바닥에 나뒹구는 배달아저씨와 고급승용차 차주의 싸움을 보고 무조건 아저씨 편을 들어봐야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현실의 나는 내 절망을 배달할 데도 없고 절망은 짜장면보다 견고해서 바닥에 엎지를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어쨌든 나는 달릴 수 없는 말이 되었다. 달릴 수 없는 말도 말일까. 그러나 절망은 희망과 동의어일 수도 있다는 것을 이때 깨달았다. 절망을 해봐야 간곡한 희망이 무슨 말인지 처음 알게 되는 것이다. 당시의 절망은 뜻밖의 우연으로 새로운 거래처가 생기면서 순식간에 해소되었고 세월 속에 파묻혔다. 세 달 전 권진규의 기록을 읽어 내려가면서  마음속 깊은 곳에 얼려놓았던 빈티지 절망감이 순식간에 해동되었다. 10년도 더 된 절망덩어리들을 하나씩 꺼내 보는데 몇 개월의 시간이 걸렸다. 성격은 급하지만 마음은 느린 사람의 필연적 버퍼링이다. 같은 시대는 아니지만 그의 절망은 순식간에 이해되었다. 절망을 공감하는 것은 희망을 공감하는 것보다 에너지 소모가 컸다.  일상생활이 힘들 정도로 슬픔이 걸러지지 않았다. 권진규의 절망이 슬픈 이유는 절망 뒤에 가려진 희망이 너무 절절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권진규는 51세의 나이에 스스로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 단 한 번도 성공적인 전시회를 열지 못했다. 당시 한국 화단에서 영향력 있던 이중섭을 비롯한 화가들 또한 가난하게 살았지만 적어도 일부 평론가와 동지들로부터 인정과 응원을 받았다. 반면에 권진규가 선택한 구상 테라코타의 길을 그나마 이해해 주고 지지해 주었던 건 그에게 조각을 사사한 스승 시미즈 다카시와 단 한번의 진정한 사랑, 도모를 포함한 극소수였다. 서양의 조각예술이 소개된 도쿄에서 계속 작업을 했으면 어땠을까. 큰 작심을 하고 고국으로 건너온 그는 철저하게 고독한 이방인으로서 살았다. 영업은커녕 고지식하게 작업에만 몰두했던 그에게 가끔씩 세상으로 나와 열었던 명동화랑 등의 전시회는 평단의 몰이해와 당시 한국화단의 냉대 그리고 판매 없이 마지막 날을 맞는 등 구도자처럼 외길을 걸어온 한 아티스트의 영혼을 조금씩 부수어 나갔다.   

1973년 5월,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작품을 판매하고 받은 돈 7만 원을 포함한 30만 원의 장례비를 가족들에게 남기고 자신의 작업실에 밧줄을 묶던 그의 심정을 헤아려보는 일은 두려웠다. '인생은 공. 파멸'이라는 짧은 소감을 벗에게 전한 채 그는 고단한 예술의 길을 끝냈다. 420점의 조각작품을 다 보지는 못했지만 그의 조각들을 보면 소름이 끼친다. 사이즈가 크지 않지만 전체적인 모양과 정교한 디테일에 권진규라는 사람이 그대로 저장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외면하고 오로지 진흙과 석고와 화덕 사이에서 구도하는 승려처럼 작품에 영혼을 새겨 넣기를 반복하던 꽤나 답답한 예술가의 존엄함이 오롯이 담겨있다. 비록 세상과 잘 소통하지 못했지만 예술가로서의 자신이 무너지는 것보다는 스스로 사라지는 편을 선택하기까지 그의 마음속에서 헛돌던 온갖 작은 희망들은 온 우주를 헤매이다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   

권진규의 <손>은 모 기업가의 첫 소장에 이어 돌고 돌아 이건희 회장을 거쳐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되었다. 손의 힘줄과 해부학적으로 불가능한 엄지의 스트레칭은 안타깝고 안쓰럽다. 저 단단한 악력으로 자신의 목을 조여줄 밧줄을 묶었다고 생각하니 아찔하다. 권진규는 지인의 도움을 구하지 않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일본에서 하숙집 옆방에 지냈던 신격호가 서울에 와서 크게 사업을 하고 있었는데도 그의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다. 풍진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조금씩 영혼도 팔아야 하고 소싯적 용납할 수 없다고 믿었던 행동도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받아들일 줄도 알게 되는 게 삶의 조건임을 강력히 거부하고 있는 손이다. 엄지를 안으로 굽혀 세상과 악수했다면 살아있는 동안 조금 웃을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상념에 또 한 번 먹먹해진다.



권진규의 고향은 함흥이다. 함흥 땅에는 특별히 말이 많아서 그의 작품에 유독 말의 두상을 비롯한 말조각들이 많이 있다. 이 말 조각은 방탄소년단 알엠의 소장품으로 권진규 탄생 100주년 기념 전시회에 출품 되었다. 한 많은 대한민국 문화가 K-컬처라고 불리우며 전 세계 곳곳으로 스며들고 있다. 늘 침략당하기만 했던 한을 푼다는 듯이 한국의 모든 문화가 온 세상에서 환대받고 있는 가운데 세계 최고 아이돌, 알엠이 소장한다는 소식 하나로 작가와 작품들이 전세계로 자동홍보가 되는 세상이 되었다. 평화로운 말의 몸짓이 누구에게나 위로를 줄 듯하다.  


얼마 전 일본 최고의 미술대학교인 무사시노 대학교에서 80주년 기념으로 졸업생 중 최고의 아티스트를 선정하는 기념이벤트가 있었는데 이중섭, 장욱진도 있었지만 투표결과는 놀랍게도 권진규였다. 너무 늦었지만 권진규가 세상에 수용되고 인정받을 때가 되었나보다.

대충 수습한 해묵은 상처와 절망을 해체하고 싶은 분이 있다면 부디 권진규를 만나시기를.  작품들이 당신 대신에 이야기를 들려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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