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눈 뜨기 연습 2시간과 '라러로루리' 100번

[나는 의사가 되기로 했다_chapter 1]

by 이진규


"무한~도전!”

시계의 초침조차 숨죽이며 움직였다. 병실 창밖의 햇살도 침대 맡에 이르기까지 한참을 망설이는 듯했다. 멈춰 선 듯한 병실 안의 공기는 누가 켜놓은지 모를 텔레비전의 한 예능 프로그램 소리와 보호자들이 소곤대는 작은 귓속말로 채워졌다. 마치 아무것도 흐르지 않는 무중력의 우주를 떠다니는 듯한 그곳에서 나는 두 눈을 감고 꿈속에서 시간을 흘려보냈다. 단순히 몸이 피곤해서는 아니었다. 고단한 오늘을 등지고 잠시라도 떠나고 싶을 뿐이었다.


“오픈 찬스, 3점 슛!”

“나이스 패스!”


기름칠된 반들반들한 바닥과 끽끽거리는 농구화 소리가 공기를 가득 채운 체육관이 눈앞에 펼쳐졌다. 학과의 명예를 건 결승전, 우리는 열정으로 뛰고 이성으로 계산했다. 땀은 흘러내리고 숨은 턱까지 차올랐지만, 가슴속 불꽃은 더욱 치솟았다.


경기 종료 7초 전, 우리가 2점 뒤쳐진 상황. 시간은 쏜살같이 흐르고 심장은 귓가에서 울렸다. 우리 팀 에이스와 눈빛만으로 교감했다. 그가 돌파하자 수비가 몰려들었고, 3점 라인 앞에선 내게 공이 돌아왔다. 경기의 운명이 내 두 손에 달려있었다.


세상은 멈췄고 내 심장만 뛰었다. 넣으면 영웅, 놓치면 죄인이다. 수백 번 연습한 손끝의 감각을 믿기로 했다. 에이스가 내게 건넨 믿음, 나는 그 믿음에 답하리라.


‘철썩’


관중의 환호는 천장을 뚫었고, 전율은 발끝까지 흘렀다. 한 점 차 역전승이었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어 어깨동무한 채 승리의 기쁨을 나눴다. 경기를 마치고 입 안에 이온음료를 털어 넣을 때의 짜릿함, 그 어떤 달콤함보다 진한 순간이었다.


“진규야, 안과 외래 갈 시간이다.”


아빠의 목소리에 꿈은 산산이 흩어졌다. 책상 위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흐릿한 시야 속에서도 분명히 보였다. 내 오른쪽 눈은 여전히 감겨 있었다. 달콤한 꿈은 기억 속으로, 쓰라린 현실은 눈앞으로 돌아왔다.


“눈이 떠지려면 최소 6개월은 기다려 봐야 합니다. 필요에 따라서는 수술을 할 수도 있고요.”

“도대체 왜 그렇게 오래 걸리는 거죠? 빨리 떠지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건가요?”

“눈 뜨는 연습을 많이 해서 눈 뜨는 근육을 키워 볼 수는 있지만,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녹음기를 틀어 놓은 듯한 안과 교수님의 대답은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희망보다는 현실을 담고 있었다. 실력 좋기로 손꼽히는 교수님이 오셨다기에 기대했건만, 그녀의 안경 너머로 비치는 눈빛은 냉정했고, 말투는 기계적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간절함에 매달렸다. 살아남으려는 자에게 지푸라기라도 잡을 수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니까.


환자에게 의사의 말은 숨 막히는 밤바다의 등대와 같다. 한 마디가 백 번, 천 번 반복되어 가슴에 새겨진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아픈 이를 만나면 단어 하나, 어조 하나까지 신중히 고른다. 말에는 상처를 주는 칼날도, 치유하는 약도 될 힘이 있으니.


교수님이 말한 ‘눈 뜨는 근육 자극’ 이 내 머릿속에 박혔다. 그날부터 누나 화장품 중 작은 전동기가 내 오른쪽 눈꺼풀 위에서 쉬지 않고 울렸다. 식사할 때도, 대화할 때도, 화장실 갈 때도, 잠들기 전까지도 ‘윙’ 소리는 계속됐다. 모래 속 바늘이라도, 찾을 수 있다면 있는 힘껏 움켜쥐어야 하는 법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기적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시나브로 눈꺼풀이 조금씩 열리고, 감춰져 있던 검은 눈동자가 세상을 향해 고개를 내밀었다. 작은 변화에도 가슴은 벅차올랐다. 물리치료사, 작업치료사 선생님들께 아이처럼 신나서 자랑했고, 그들은 내 일을 자기 일처럼 기뻐해 주었다. 느리게 피어나는 희망, 조금씩 단단해지는 믿음, 아 정말 행복한 순간이었다.


“어? 이진규 님, 눈 다 떠진 것 같은데요?”

“제 눈이요? 벌써 그런가요?”

“축하해요. 오늘부터 재활치료 한 단계 올려야겠는데요?”

“아, 잠시만요, 선생님...”


기대는 높이 날았지만, 현실은 낮게 내려앉았다. 눈꺼풀은 열렸지만, 세상은 둘로 갈라졌다. 눈동자는 중앙에 머물지 못하고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흔히 말하는 사팔뜨기 눈이었다. 드라마 같은 완벽한 결말을 기대했지만, 인생은 언제나 빈 페이지를 남겨두는 법이었다.


그래도 눈이 떠진 것만 해도 감지덕지였다. 평생 한쪽 눈을 감은 채 살 수도 있었고, 수술을 해야 할 수도 있었다. 호주머니의 오백 원이 없어져도 방을 뒤집어 찾는 것이 사람 마음인데, 하물며 평생 단 두 개뿐인 눈이 돌아왔다. 절반의 성공이 아니라 온전한 기적이었다.


거울 속 내가 두 눈을 뜨고 있는 모습이 신기했다. 남에게는 숨 쉬는 것만큼 자연스러운 일상이, 내게는 일생일대의 행운이자 기적이었다. 자신감은 조금씩 자라나 어제의 나보다 오늘의 내가 더 단단해졌다. 병원 1층 정원에 내리쬐는 햇살은 더 따스하게 느껴졌고, 마주치는 이들의 눈길도 더 이상 피하지 않았다. 노력의 결실이든, 운명이 불쑥 건넨 선물이든, 성취는 늘 달콤했고, 나를 앞으로 밀어주었다.


"라라라라라, 러러러러러, 로로로로로... 아빠, 이번이 몇 번째지?"

"93번째, 7번만 남았다."


한 정상을 오르니 또 다른 봉우리가 보였다. 눈이 떠졌으니 이제 목소리를 되찾고 싶어졌다. 매일 병실 천장을 바라보며 하루 백 번의 발성을 반복했다. 매일 백 번째 소리는 녹음한 뒤 언어치료사 선생님과 함께 듣고 피드백을 받았다.


언어치료를 시작하던 날, 선생님은 자신 있는 글을 읽어보라고 하셨다. 나는 불과 몇 달 전, 최우수상을 받았던 연구 발표 대본을 꺼냈다. 이미 머릿속에 내용이 다 들어 있었다. 기억 속의 나는 자신만만했고, 현실의 나는 그 자리로 돌아가고 싶었다. 어깨를 펴고 첫 문장을 읽었다.


“안녕하심니끄아 제 이르믄 이진규임니드아.”

“이진규 님, 천천히 읽어보세요.”

“제 연구 주제는 카본 나노다세 관련된 것임니드아.”

“괜찮아요. 급할 거 없어요. 제 입모양을 보고 따라 해볼까요?”


과거의 나는 물 흐르듯 말했지만, 지금의 나는 단어마다 망설이며 툭툭 끊어 말했다. 부끄러움은 서둘렀고, 서두름은 실수를 낳았다. 겸연쩍은 웃음으로 대본을 덮었지만, 나는 이미 발가벗겨진 듯했다.


아기가 말을 배우듯, 나도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모음은 입을 열고, 자음은 입을 닫는다는 것을 배웠다. 모음과 자음을 섞어 만들어 음절 하나씩 소리 냈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갓난아이의 첫 발걸음처럼 조심스럽게 나아갔다.


더디게 가는 길이 답답했다. 어떤 날은 참지 못하고 예전 대본을 꺼내 읽어보았다. 여전히 어눌했지만, 미세한 변화가 느껴졌다. 발음에 힘이 실렸다. 예전에는 스치듯 지나쳤다면, 이제는 한 음절 한 음절 맛보는 여유가 생겼다. 급하게 삼키는 음식보다 천천히 씹는 음식에서 깊은 맛을 느끼듯, 내 말에 도 깊이가 더해졌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따스한 봄바람과 함께 만개하는 분홍빛 벚꽃, 쨍한 햇볕아래 해변에 부딪혀 사라지는 푸른 여름 바다, 공기가 쌀쌀해질 때쯤 황금빛으로 물들어 떨어지는 단풍잎, 온화한 분위기에 푹신한 소파에 앉아 창밖을 바라볼 때 소복이 쌓이는 눈. 분주하게 달리는 마음을 멈춰 세우고 주변을 돌아볼 때, 곁에 항상 있지만 잊고 살았던 보물을 발견하게 된다.


이전의 나는 늘 서둘렀다. 미래를 향해 달려가느라 지금 이 순간의 아름다움을 놓쳤다. 뇌출혈 사고는 그 질주를 멈추게 했고, 세상을 보는 새로운 창을 열어주었다. 눈을 감았을 때 비로소 진짜 보아야 할 것들을 보게 되었다. 느리게 말할 때 비로소 진심을 담는 법을 배웠다.


느리다고 멈춘 것이 아니라, 다르게 걷기 시작한 것이다. 살아가는 것은 넘어지는 것이고, 살아내는 것은 다시 일어서는 것이다. 살다 보면 때때로 넘어지겠지만 툭툭 털고 일어나면 된다. 그제야 비로소 함께 걷는 이들의 따스함과, 하늘에서 내리는 햇살의 축복과, 살랑이는 바람의 속삼임을 느낀다. 내가 살아 있음을, 인생은 살 가치가 있음을 느낀다. 내게 주어진 반짝이는 하루를 눈부시게 살아갈 힘을 얻는다. 오늘을 뜨겁게 사랑할 수 있다.


나는 분명히 멈췄다. 하지만, 계속 걸었다. 느려도 괜찮았다. 달리고 있었으면 보이지 않았을 소중한 것들을 보았으니까.


내 삶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매일 눈 뜨기 연습과 ‘라’, ‘러’, ‘로’, ‘루’, ‘리’ 백 번은 끝났지만, 다시 태어난 삶의 여정인 이제 막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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