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15시간 연구, 꿈에서도 연구

[chapter 4 환자를 위로해 줄 수 있는 의료기기를 만들고 싶어요]

by 이진규
연구를 한다는 것은


끝이 보이지 않는 좁고 긴 어두운 동굴을 지나는 것과 같다. 들어가는 것은 마음대로지만, 나오는 것은 그렇지 않다. 한번 발을 들인 이상, 죽이 되는 밥이 되든 끝을 봐야 한다. 그럴 각오가 없다면 시작하지 않는 편이 낫다. 중도에 포기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대가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결국, 연구는 나 자신과의 지독한 싸움이다. 아직 아무도 해내지 못한 일을 해내는 것이 좋은 연구다. 다시 말해, 어디로 향할지 알 수 없는 초행길을 홀로 걸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 길은 고단하고 때로는 외롭다.

그렇다고 해서 연구가 늘 힘들기만 한 것은 아니다. 처음 걷는 길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보람이 있다. 아무도 지나가지 않은 길은 새롭고 신비롭다. 길 위에서 발견한 예쁘고 소중한 자갈돌에 대해 연구실 동료들과 나눌 수도 있다. 이 기쁨은 그 길을 걸어본 사람만이 누릴 수 있다.

대학원에서 나의 하루는 꿈에서부터 시작된다. 몇 달째 풀리지 않는 실험 때문에 머리를 싸매고 있다. 어젯밤 꿈속에서 새롭게 새운 가설을 시험해 보았는데, 결과를 확인하기 직전에 깨어났다. 궁금해서 미치겠다. 얼른 실험실에 가서 확인해 봐야겠다는 생각에 얼른 출근 준비를 했다.

사무실에 짐을 풀기도 전에 비릿한 화학 약품 냄새가 진동하는 실험실에 먼저 들어섰다. 어제 용액에 담가둔 샘플을 확인하기 위해 후드 앞으로 다가섰다. 며칠을 갈아 넣은 실험의 결과를 확인할 시간이다.


‘제발... 제발... 이번에는 꼭...!’


망했다. 어째서 슬픈 예감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는 건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공정 과정을 하나씩 되짚어 본다. 아무래도 고분자 물질의 농도 비율이 맞지 않았던 것 같다.

괜찮다. 그럴 수 있지. 다시 처음부터 시작한다.

이번에는 고분자 물질의 농도 비율을 조정해 다시 섞는다. 진공을 잡고 세 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구리 필름을 자르고 유리관에 넣어 온도를 올린다. 유리관 온도가 1000도에 도달하면, 메탄, 수소를 흘려주며 서서히 식힌다. 그렇게 그래핀을 구워낸다.


꼬르륵. 어느덧 점심시간이다.


대학원생은 불쌍하다. 공부할 때는 학생이지만, 일할 때는 근로자다. 다시 말해, 공부할 때는 근로자가 아니고, 일할 때는 학생이 아니다. 그래서, 권리는 없고 의무만 있다. 학기마다 시험을 봐야 하고 비싼 수업료를 내야 하지만, 받는 월급은 최저시급에도 못 미친다. 정해진 근무시간도 없다. 전생에 죄를 지으면 대학원에 간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우리 연구실의 공식 출퇴근 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10시까지였다. 자는 시간을 빼면, 하루 대부분을 연구실에서 보내는 셈이었다. 하지만, 내 하루는 아침 7시에 시작됐고, 집에 돌아오면 밤 11시가 넘기 일쑤였다. 말 그대로 기숙사는 잠만 자는 곳이었다. 그만큼 연구에 푹 빠져 있었다.

나는 뼛속까지 공돌이다. 언제, 어디서든 실험을 떠올리며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그리고 주변의 다른 공돌이들과 토론했다. 나보다 똑똑한 사람이 주변에 많다는 것은 정말 감사한 일이다. 그렇게 연구 가설을 세우고, 실험을 계획하며 새로운 기술을 익혔다. 조금씩 성장해 가는 순간이 정말 즐거웠다.

가끔 지도교수님의 무리한 요구에 숨이 턱 막힐 때도 있다. 하지만, 대학원생에게 불가능이란 없다. 안되면 되게 해야 한다. 아니, 최소한 된 것처럼 보이기라도 해야 한다.

센서 성능을 확인하려면 땀이 필요하다고? 사우나에 가서 직접 긁어모았다. 교수님이 휴대폰 앱을 만들어보라고 하면? 일주일간 도서관에 틀어박혀 코딩만 했다. 동물 실험을 할 때는 당뇨병 걸린 생쥐들을 하루 열 시간씩 지켜보기도 했다.


하지만, 비 온 뒤에 땅이 굳어진다는 말처럼, 몇 달간 고민하던 문제가 극적으로 해결되는 날도 있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밤이었다. 몇 달째 같은 문제를 붙잡고 씨름하고 있다. 이 부분만 어떻게든 넘어가주면 좋으련만, 결과는 번번이 실패다. 며칠째 꿈에서도 나를 괴롭히고 있다. 창 밖에는 소나기가 쏟아지고, 연구실 선배들은 하나둘씩 집으로 향한다. 나는 홀로 실험실에 남아 처량하게 샘플이 담긴 비커를 바라본다. 비커에 담긴 용액은 보글보글 끓고 있었고, 내 마음은 내리는 비처럼 울고 싶었다.

이번 실험만 성공하면 2년 가까이 매달려온 프로젝트가 마무리된다. 그러면 내 영어 이름이 박힌 논문이 근사한 저널에 실릴지도 모른다.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뛴다. 다시 한번 힘을 내본다.

아침부터 실험실 곳곳을 누비며 소중하게 키운 탄소 나노튜브 전극. 이제 남은 건 이 녀석들을 고무처럼 부드러운 밴드 위에 올리는 일이다. 하지만, 머리카락 두께의 천 분의 일 정도의 크기라 결코 쉽지 않다. 조심스럽게 실험을 마무리하고 애지중지 만든 샘플을 깨끗이 씻어 말린다. 이제 현미경으로 결과만 확인하면 된다.

잠시 눈을 감고, 테이프를 되감듯 지나온 시간들을 떠올린다. 큰 뜻을 품고 연구실 문을 처음 들어섰던 날이 까마득하게 느껴진다. 시간을 아끼며 치열하게 살아왔지만, 실험이 뜻대로 되지 않아 속상할 때도 많았다.

‘내게 비상한 머리가 있었다면 결과가 달랐을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울적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누구나 처음엔 미숙한 법이다. MIT 교수 아저씨도, 지도교수님도 처음에는 다 서툴렀을 것이다. 설 익은 사과가 세월을 먹으며 내실이 단단해지고 새빨간 빛깔의 탐스러운 열매로 싱그럽게 익어가듯, 성장하는 기쁨은 미숙한 사람만이 누리는 특권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진짜 재미는 결과가 아니라 과정을 걸어가는 순간에 있다.


“박사님! 성공했습니다!”

“내일 소고기 먹자, 진규야.”


성공이었다. 현미경 렌즈 안에는 시커먼 탄소나뉴튜브 전극들이 가지런히 열과 줄을 맞추어 정렬되어 있었다. 반듯하고 깔끔하게, 생채기 하나 없이 줄지어 있는 모습이 늠름하면서도 어딘가 귀엽기까지 했다. 몇 달 동안 그렇게도 보고 싶던 광경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뽀뽀라도 해주고 싶었다.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자정, 퇴근길은 오히려 밝았다. 앞이 잘 보이지 않을 만큼 깜깜했지만, 도로 위 가로등이 환하게 길을 비추고 있었다. 그 불빛은 마치 방황하는 나에게 이리 오라고 손짓하는 것만 같았다.

오늘은 특별히 그 손짓에 응하기로 한다. 버스를 타는 대신, 기숙사 방향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도로 위에 발을 디딜 때마다 마치 푹신한 침대 위를 걷는 듯 몸은 사뿐하고 코끝에는 달달한 풀 내음이 감돈다. 주변에 아무런 인기척 하나 없어 으스스할 법도 하지만, 괜찮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길을 비춰주는 가로등이 있어, 망설이지 않고 나아갈 수 있다.


누구라도 붙잡고 자랑하고 싶다. 이 벅찬 감정을 나누고 싶다. 내가 생각해 낸 방법이 맞았다고, 결국 문제를 풀었다고. 그렇게 찾아 헤매던 길을 드디어 찾았다고.


오늘, 초행길에서 주운 자갈돌은 반짝이고 있었다. 그 빛나는 조각이, 다음에 발견할 또 다른 자갈돌을 기대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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