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애 흐애 흐애 응애! 애애애애애-!"
"으아아아아아-!"
2년차 새댁이는 혼돈과 절망의 도가니 속에 빠졌다. 이게 대체 무슨 소동이람.
6개월이 되지 않은 아기는 그치지 않는 울음으로 나와 남편의 정신을 쏙 빼놓고 있던 중이었다. 견디고 견디다 못해 현관문을 벌컥 열고 나간 남편은 참아 왔던 답답증을 복도식 아파트 한가운데에서 쩌렁쩌렁 울리게 고함으로 토해냈다.
저 사람이 지금 제정신인가. 애가 좀 울었기로서니 그게 듣기 힘들다고 나가서 소리를 지르다니. 아빠 자격이나 있는 것인지. 아기를 들쳐 안고 연신 둥가둥가 달래며 '응 응, 우야 우야, 그래 그래, 괜찮아'와 '하아' 하는 한숨이 섞여 라임처럼 반복되었다. 남편은 딸도 몰랐지만 아기에 대해서도 참 몰랐다.
그로부터 10년이 더 흐르는 동안의 고비고비마다 나는 남편에게 딸 언어 통역사로 살아왔다. 서로가 외계인 취급하는 부녀 사이에서 외계어 통역도 하게 될 줄 알았더라면 일찍이 외국어 공부 정도야 껌이었어야 하는 건데.
남편, 그는 굴절하지 않는 빛의 성정이며 의지가 굳세며 주관이 뚜렷하기가 고결한 매난국죽 같았으니... 한 마디로 다루기 뻣뻣하다는 말이다. 어느 날은 작심하고 살살 달래며 솔루션을 제시했다.
"여보, 여자애들은 남자애들이랑 뒤끝이 달라서 공평함보다는 그냥 좀 편애하듯이 감정을 받아줘야 해."
그럴 수가 없단다. 자기는 공명정대한 사람이란다. 똑같이 대해주어야 한단다.
이런 된장, 좀 굽히면 어때서.
아내에게도 사실에 근거한 판단이라든지 하는 그놈의 공명정대함을 잣대로 편을 들어주지 않는 것이 야속하였던 참이라 딸 얘기를 빌미로 나의 마음도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었는데. 아주 그냥 대쪽 단칼이다.
사실 남편에게는 여기서 함부로 밝힐 수 없는 아픈 가정사가 있다. 어려서부터 힘든 일을 차례로 겪으며 20대까지 참으로 힘겨운 시간들이었다. 그런 자신을 강하게 이제껏 지켜온 것이 대견한 사람이다. 딸아이의 사춘기는 본인의 입장에선 복에 겨운 사치였을 것이다. 편안한 시대에 태어난 자의 유치한 투정이었을 것이다.
그러던 그의 굳은 심지에도 골다공증이 오는 날이 도래하였다. 엄마와도 대화가 불가능한 상태로 으르렁거리는 딸애를 달래기 시작했다. 눈빛이 살짝 맛이 간 사춘기 자녀를 다루는 모습이 마치 서울대공원 맹수사의 노련한 조련사와 같다. 도른자의 눈빛이 돌아온다. 온순해졌다.
감탄이 나왔다. 욱하던 그 성질 어데로 간 것인가. 믿을 수 없는 극한의 인내심과 침착함이 어디서부터 나온 것일까.
이런저런 이유야 어찌 되었든 요점은 꺾이지 않던 자신의 관념이 유연해졌다는 것이다. 세월이, 더 이상 온순하지 않은 아내가, 언제나 예상을 벗어가는 세 자녀가 그를 부드러운 남자로 만들고 있다. 옳다고 여겼던 소신이라 할지라도 때로는 자신을 누그러뜨려야만 이점이 있음을 체득화하였다. 자식들이 어렸을 때나 말을 듣지, 머리통 커 가는 놈들에게 화내고 윽박질러봤자 신념을 관철해 나가기 어려움을 알았음이다.
덕분에 시간적으로 물리적으로 딸과 부딪힐 일이 잦은 나를 대신하여 중재자가 되어주니 얼마나 고마울 따름인지.
어쩌면 남편의 극강의 참을성은 지난주 수요일, 계엄발표 이후 강화된 것 같기도 하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가라앉히며 마음의 평화를 찾기 위해 노력하던 모습이 어찌나 간절하던지. 미디어와 가까이 있으면 무의식적으로 계속 뉴스를 찾으며 부정적인 생각에만 사로잡힐 자신의 삶이 저어 되었나 보다. 핸드폰과 pc에서 분리되어 스스로를 골방에 두거나 가족과 대화하고 다른 활동에 집중하려는 노력이 보였다.
정말 어찌할 수 없는 분노를 만나 극복을 하면 인내심의 임계치가 높아지는 결과랄까. 그깟 사춘기의 지랄, 정신 나간 독재자의 술주정 같은 만행에 갖다 대면 조족지혈이었을 뿐.
시간이 지나며 어른이 되면 후회할 한 때의 기세는 양육자가 유연하게 대처하면 된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도, 나이가 먹어도, 어느 한 자리를 맡아도 전체를 아우르고 부분을 살필 줄 모른 채 자신의 좁은 소견을 뻣뻣하게 내세우면 그 뜻에 함께 가려는 자가 얼마나 되리. 위를 향하여 곧게 뻗는 나무는 하늘만 볼 뿐이지만, 적당히 휘고 꺾이면 보지 못했던 주변과 아래로 시야가 넓혀지기 마련이다. 아집의 성벽에 세운 장대를 꺾고 문을 열어야 한다. 눈과 귀와 마음의 문을.
중꺾마. 결국 중요한 건 꺾이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