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와 전쟁

먹고사는 일

by 빨강



비가 온다는 핑계로 산책을 가지 않았다. 향초를 켜고 집안에 습기를 말렸다.


겨울에는 샤워를 하고 나오면 건조하게 데워진 공기에 머리가 빨리 말랐다. 젖은 머리로 티브이 앞에 앉아 영화를 본다. 전술을 짜는 주인공의 독백이 낮게 들려온다. 정신을 딴 데 팔고 있어서 인물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안 들렸다 한다.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나팔소리만 길게 들린다.

3.1절이라 티브이는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작품을 방영한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희생된 위인들이 조명된다. 어울리게, 그날에 어울리게. 화면에서 대포가 펑펑 터진다. 사람들이 죽어나간다.


콩나물을 씻어서 파와 통마늘을 넣은 냄비에 넣고 끓인다. 콩나물이 익어서 휘어지면 삼분의 일을 덜어내어 소금과 파, 고춧가루, 참기름을 넣고 무친다. 이렇게 하면 국과 반찬을 한 번에 할 수 있다. 많은 콩나물에서 나온 채즙으로 국은 더 진해진다. 국이 다 끓으면 통마늘과 파는 건져낸다. 마늘은 콩나물을 쪼그라들게 만든다.


마른 팬에 잔멸치를 볶다가 구운향이 나면 기름을 넣어 볶는다. 기름에 타닥타닥 멸치가 튀겨지는 소리가 난다. 불을 끄고 팬의 중앙을 비워 설탕을 진간장에 녹인다. 기름과 만난 간장설탕이 멸치에 코팅된다. 바삭바삭한 밥반찬이 된다. 벌써 두 개의 반찬과 국이 완성되었다.



정육점의 소 잡는 날에 산 돼지고기 삼각살을 굽는다. 항정살 같기도 하고, 목살 같기도 한 질감의 고기가 프라이팬에서 노릇하게 익어간다. 새로운 정육점에 가면 가끔 못 보던 부위들을 만날 수 있다.


영화가 후반부로 향하고 적들에게 패배하려는 때, 장군의 기지로 살아남은 인물이 칼을 휘두른다. 나는 저 칼끝이 사람을 관통할 수 있다는 사실이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잘 벼른 칼로 한 근의 고기도 썰기 힘든데, 성인 남자의 몸을 가르는 저 칼이 놀랍다. 영화가 끝을 향해 갈수록 처절한 전투가 이어지고 목숨을 걸고 싸우는 병사들의 절규가 이어진다. 주인공이 죽어야 끝나는 이 전쟁은 가혹하다.


먹고사는 게 전쟁이라는데, 영화 1부와 2부 사이에 광고에서는 이런 시대에도 전쟁 때문에 굶고 있는 아이들을 후원하라고, 그들을 살리는 큐알코드와 후원단체명이 티브이 회면 아래 깜박인다.


영화가 지나가는 동안 머리가 반쯤 말랐다. 손빗질을 하자 축축한 안쪽 머리칼이 만져진다. 매달 후원하는 단체에서 전쟁을 막아야 한다 내용과 함께 인권보호에 대한 문자가 왔다. 집 안에서 전쟁영화를 보는 나와 전쟁의 한가운데 있는 아이들과의 괴리감이 익숙해지지 않는다. 따뜻한 한 끼를 먹고, 따뜻한 물에 몸을 씻고, 당장 살아있는 것에 위협을 받지 않는 세상에서 사는 나는 운이 좋다.


봄비가 봄을 알리고, 봄앓이가 시작되는 때에 하루하루 죽고 사는 게 현실인 사람들을 떠올린다. 그들이 봄비로 인해 목마르지 않길 바라본다.


경칩에 비를 맞고 있는 개구리





이전 14화지는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