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
기억과 두려움 – 프롤로그
소리
열세 살 여름, 오른손에는 종량제봉투가 들려있었다. 분유, 귀저귀, 생리대. 삐죽나온 파, 애호박, 두부가 묵직했다. 네 손가락의 3번째 마디가 아팠다. 아파트 사이로 붉은 해가 내려앉는 날, 보도블럭 위를 걸어 집으로 갔다. 그때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잔 등에 땀이 흘러내렸다.
나는 할머니다. 죽기 전 과거를 떠올리고 있다.
그 목소리는 확고하고 확신에 차 있었다. 그때부터 감당하기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과거의 어느 날을 회상하는 중이라고 생각했다. 때때로 알 수 없는 두려움에 휩싸이는 나는 그날부터 죽음과 늘 함께했다. 때때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는 예상치 못한 순간 들려왔고, 어느 날은 확실한 목소리로 어느 날은 잡음에 가까웠다. 그 목소리는 내 삶 곳곳에 영향을 미쳤다.
그날부터 시작된 목소리는 여름 내내 나를 괴롭혔다. 달궈진 아스팔트에서는 아지랑이가 지는해를 일러그뜨리며 피어올랐다. 비닐봉지가 허벅지에 부딪히며 바스락바스락 소리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