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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카락

잘리는 기억

by 빨강




일 년을 길렀던 머리카락을 잘랐다. 가위가 지나간 자리마다 머리카락이 일직선으로 잘려있다. 목덜미가 드러난다. 가려졌던 귓불이 보인다. 머리카락을 자를 만큼 길었다는 건 내가 살아왔단 증거다. 때에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약간의 운동을 하고 머리를 감았다는 뜻이다. 나름대로 착실히 살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잘려나간 머리카락이 미용실 바닥에 후드득 떨어질 때, 기억들이 후드득 떨어지는 기분이 든다. 잠이 오지 않아 머리를 왼쪽으로 넘겼다가 오른쪽으로 돌아 넘기던 날들이 떨어져 나간 것 같다. 아직도 숱이 많아서 한 뼘이나 잘려나간 머리카락이 아깝지 않다.


길면 잘라야 하는 것들이 있다. 더 자라나기 전에 잘라내야 하는 것들이.


머리를 감으면 부정적인 기억이 떠오른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선지, 눈을 감아야 해서인지, 늘 힘들고 어려운 기억이 떠오른다. 그럴 때는 속으로 숫자를 센다. 일부터 백까지. 내가 세는 수는 일정치 않아서 하나가 길고 둘이 짧다. 오십이 짧고, 오십이가 길다. 초침과 하나도 맞지 않는 나만의 수세기는, 샤워를 마칠 때까지 십오 분쯤 되지만 실제 시간은 30분쯤 된다.


단발이 되니 여름 햇볕을 더 잘 느끼게 된다. 귀밑머리에 땀이 흐르는 게 더 잘 보인다. 머리를 묶어도 반은 빠져나온다. 두발규정이 있던 중학교 때가 떠오른다. 그때는 한 달에 한번 꼬박 머리카락을 잘라야 했다. 그것 말고도 잘라내야 하는 감정들이 많아서 늘 할머니가 되길 소망했다.


이제 손발톱을 2주에 한번 잘라도 불편하지 않다. 예전만큼 빨리 길지 않는다. 간직되는 기억들도 적다. 스스로를 잘라 온 날이 오래되었다.


엄마의 등에 업혀오던 병원을 엄마의 팔을 잡고 온다. 엄마는 병원 에스컬레이터에 발을 헛디디는다. 엄마는 솟아오르는 계단에 발이 걸린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발, 발, 이라고 주의를 준다.


기억이 잘라나간 자리에 새로운 기억이 덧대져 무럭무럭 자란다. 머리카락이 자라듯 죽을 때까지 쉬지 않고 자란다. 슬픈 기억을 쇠약한 엄마가 덮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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