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얼굴
비가 내려 산책을 쉬었다. 날마다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하면 밤산책을 했다. 비가 와도 우산을 쓰고 걸었다. 오늘은 한숨도 못 잔 어제의 여파로 저녁을 먹자 맥이 빠졌다. 게다가 하루 종일 비바람이 치고 있었다. 적당한 핑곗거리가 생겼다.
천천히 동네를 산책하다 보면,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사람을 가장 많이 만나게 된다. 강아지들은 수직으로 바닥에 서 있는 모든 것의 냄새를 맡는다. 그리고 자기 냄새로 덮는다. 큰 강아지는 큰 강아지대로 작은 강아지는 작은 강아지대로 똑같은 행동을 한다.
밤운동을 나온 사람들은 열중한 표정을 가지고 있다. 자신만의 목표가 있다. 건강한 신체, 날렵한 몸, 저녁을 소화시키겠다는 다짐.
세 명의 아줌마가 팔을 힘차게 저으며, 내 옆을 지나친다. 달리기를 하는 건강한 남녀가 내 옆을 두 번째 지나친다. 모두 열심히 산다. 매일 하는 산책 속에는 일상이 있다.
습한 공기에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난다. 목덜미가 축축하다. 잔머리가 얼굴에 달라붙는다. 선풍기를 틀어놓고 잠이 든다. 자다 깨보니 사방이 어둠이다. 바람을 맞으면서 자면 얼굴이 붓는다. 손도 발도 땡땡하다. 자는 사이 남의 얼굴이 되어버린다. 남의 얼굴로 어둠을 본다. 소화되지 않은 밥알들이 묵직하게 위장을 채우고 있다. 비바람이 일어도 산책을 가야 했다. 사선으로 내리는 비를 우산을 쓰고 맞았어야 했다.
비만 내리는 산책길에 오른다. 바람이 잦아들었다. 사방이 짙어져 있다. 바닥도, 나뭇잎도, 신발도 밤 때문인지 빗물 때문인지 마음 때문인지 어두워졌다. 어두운 길에 가로등 아래만 환하다. 그 빛 아래에서 밝아진 우산, 마음에 불이 켜진다. 반쯤 내 얼굴로 돌아온다. 반쪽 얼굴은 며칠이 지나야 돌아올까. 선팅 된 차창에 커다란 얼굴과 빗방울에 갇힌 여러 개의 얼굴이 흘러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