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냄새
탁자에 앉아 책을 읽는다. 한 장을 넘길 때마다, 복숭아 단내가 난다. 가만히 방에 고여있던 공기가 책장이 넘어갈 때마다 일어나서, 숨을 쉴 때마다 냄새가 딸려 들어온다. 탁자 끝에 놓여 있는 신비복숭아 냄새.
주말에만 시장에 오는 과일아저씨는 살구나 복숭아, 수박 같은 무르기 쉬운 과일들을 팔았다. 도매 방식으로 떼와서 한 바구니에 만원씩, 다른 과일집에 반 가격에 팔았다. 매끈한 과일들은 채워지는 족족 팔려나갔다.
과일을 살 때는 반은 포기해야 한다. 성한 과일은 늘 반밖에 없다. 무르거나, 벌레 먹거나, 안이 썩었거나, 멍이 들어있다. 성한 복숭아를 골라 냉장고에 넣어놓고, 무르고 상한 것들을 씻어 언제든 집어 먹을 수 있게 씻어서 그릇에 담아 놓았다.
마침 끝물의 복숭아에서 빠져나온 싱싱한 복숭아 애벌레가 책상을 힘차게 가로지른다. 머리는 연두색, 몸은 연한 복숭아 색인 이 애벌레는 몸을 폈다 접었다 하며, 앞으로 나아간다. 살려고. 낯선 곳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몰라 허둥지둥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다. 복숭아를 먹고 자란 매끄러운 핑크색 몸이 반짝반짝 인다. 하지만 우린 한 공간에 공존할 수 없다.
새 책에는 새 책의 냄새가 난다. 미모지의 냄새. 잉크의 냄새. 코팅지의 냄새. 책을 싸고 있었던 랩핑지의 냄새. 저자의 삶이 그려지는 냄새. 여름의 습하고, 메마르고, 땡볕에 익어가는 나무와 대리석의 냄새가.
복숭아를 한입 깨어물면 과즙이 손바닥을 지나 손목으로 흐른다. 노란 과즙의 싱그러운 냄새가 입안을 가득 채운다.
복숭아 한 알에 실려 우리집까지 온 애벌레는 숨죽이고 숨어있다가 책을 읽는 조용한 시간에 복숭아밖으로 나왔다. 그만 나와 만나고 말았다. 둘 중 하나는 사라져야 하는 하필 이 공간에서.
휴지로 살짝 복숭아벌레를 집어 들고 어디로 갈까 갈팡질팡한다. 눌러 죽일 용기는 없고, 창밖 시멘트 바닥으로 던질 용기도 없다. 나에게 가장 덜 잔인한 방법으로, 애벌레를 감쌌던 휴지째 양변기에 넣기 물을 내린다. 물이 소용돌이치면서 빨려 나간다. 방금까지 있던 존재가 사라졌다. 눈을 깜박이자 속꺼풀이 복숭아색이다.
온 세상이 과육이었던 복숭아 애벌레의 세상이 사라졌다. 책 속 문장을 소리 내서 읽는다.
“ 나 역시 빛과 그림자를 지닌 하나의 존재라는 사실”
하나의 존재가 하나의 존재에 의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