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맛
검지손가락만 한 태극잠자리가 보도블록에 누워있다. 굳은 다리를 허공에 대고 잠자리의 시간이 멈췄다. 그러나 두 쌍의 날개는 곧이라도 날아오를 듯 펼쳐져 있고 지는 해를 등지고 바람에 몸을 맡길 것만 같다. 상처 하나 없이 온전한 몸으로 퇴근길에 꼼짝없이 막 생명을 다한 잠자리. 바닥에 떨어진 빨대처럼, 껌종이처럼, 영수증처럼 처음부터 무생물이었던 것처럼.
고구마순의 보랏빛 줄기 끝에는 심장모양의 이파리가 달려있다. 한 다발의 고구마 순은 꽃다발처럼 청과물가게에 쌓여있었다. 웬만한 선물보더 더 정성이 들어가야 하는 모습으로.
고구마줄거리는 껍질을 벗겨야만 조리를 할 수 있다. 줄기 중간을 똑 분질러 보라색 껍데기를 양쪽으로 쭉 벗겨낸다. 분질러진 자리에는 진액이 줄기 끝에 맺힌다. 그 줄기 끝을 손톱으로 잡고 나머지 껍질을 벗겨낸다. 줄기 하나에 네 번은 벗겨야 연두색 속살이 나온다. 줄기를 자르고 벗기기를 반복하다 보면 검지와 엄지 끝에 새까만 물이 든다. 며칠은 머리를 감아야 지워지는 검은 물.
할머니의 손끝은 늘 검은 물이 들어있었다. 손끝은 손톱 밑부터 갈라진 논바닥 같이 검은 길이 나 있었다. 할머니는 뭔가를 다듬고 있거나 신문지를 펼쳐서 다듬을 거리를 부려 놓았었다. 여름이면 머위, 깻단, 쪽파, 고구마줄거리, 날마다 종류는 달라졌다. 할머니의 손끝에는 온갖 풀물이 들어 한여름의 숲 속처럼 검은 물이 들어 있었다. 고구마줄거리는 손끝을 검게 물들이는 주범이었다. 까도 까도 줄지 않을 것 같은 고구마줄거리는 우리 세 자매가 좋아하는 반찬이었다.
껍질을 깐 고구마줄기를 찬물에 씻어 소금물에 데친다. 다시 찬물에 헹구면 연두색이 풀색에 가깝게 진해진다. 손으로 꼭 짜서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르고 기름을 두르고 고구마줄기를 볶는다. 마늘, 양파, 파, 청양고추를 넣고 볶다가 간장, 액젓, 매실청을 넣고 숨이 죽을 때까지 볶는다. 마지막으로 들깨를 넣고 잔불에 볶고, 참깨를 갈아 넣는다.
해가 진다. 고양이가 창문 앞에서 운다. 방충망을 꼭 붙잡고 잠자리가 쉬고 있다. 날개를 활짝 펴고 꽁무니를 움츠렸다 늘린다. 짝을 찾아 물가로 돌아가는 잠자리.
여긴 아니야 좀 더 위쪽으로 가야 해.
날개를 파닥이더니 철망을 놓는다. 머뭇거리지 않고 날아가버린다. 잠자리를 눈으로 좇는다. 순식간에 풍경이 되어 사라진다. 이 여름 생명이 다할 때까지 산비탈 수로에 알을 낳고 또 낳을 태극잠자리. 가엽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해서. 많은 생명을 탄생시키고 떠나보내는 이 여름이 길어서. 불어오는 뜨거운 바람에 땅거미가 지는 걸 한참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