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맛
바람은 어디에서 불어오나. 한결 시원한 바람이 정면에서 불어온다. 나무 벤치에 앉아 개 짖는 소리를 듣는다. 갑자기 나뭇잎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잔머리가 우수수 일어났다가 엉키고 흐트러진다. 일방통행 길을 배가 불룩한 고양이가 천천히 가로지른다. 개여뀌와 제비꽃이 뒤엉켜 자란 풀숲 사이로 고양이가 유유히 사라진다. 아스팔트 바닥에서 뜨거운 열기가 느껴진다. 순간 바람이 지열을 날려 보낸다.
노지 깻잎이 흰 박스 안에 빼곡히 들어있었다. 한 근에 만원이라는 사장님께 반근만 달라고 했더니, 뭐를 해 먹을 거냐고 물었다. 깻잎절임을 한다고 답하자 무조건 한 근을 사야 한다며 검은 봉지 가득 한가득 깻잎을 담아주신다.
숨이 죽으면 먹을 게 없어.
어쩔 수 없이 계산을 하고 돌아서는데, 깻잎 한 근을 한 장 한 장 씻을 생각에 막막하다. 깻잎은 절이면 부피가 반의반으로 주는 것은 사실인데, 사장님의 기세에 눌려 덜컥 한 근을 산 게 후회스럽다.
수도를 틀고 한 장 한 장을 흐르는 물에 깻잎을 앞 뒤로 씻는다. 도저히 줄 것 같지 않은 반복 노동이 계속된다. 중간중간 벌레 먹거나 노랗게 변한 깻잎을 골라낸다. 다 씻고 나자 팔뚝과 종아리가 욱신거린다. 채반에 얹어놓은 깻잎에서 물방울이 후드득후드득 떨어진다. 물기가 빠질 때까지 잠시 기다린다.
파를 썰고, 홍고추와 청양고추를 같은 비율로 썬다. 물을 조금 넣고, 마늘, 고춧가루, 통깨, 간장, 생강청, 앵두청, 설탕을 넣고 섞어준다. 약간 덜 짭짤하다면, 멸치액젓을 약간 넣는다. 마지막으로 참기름을 넣고, 양파를 넣을까 말까 고민한다. 지금은 조금 지쳤으니 생략한다. 지치면 어떤 음식도 맛있게 먹을 수 없다. 음식도 기운이 있을 때 먹어야 맛이 있다. 여름을 나려면 너무 열심히 살면 안 된다.
할머니들이 놀이터 정자에 각자 가져온 스티로폼 박스를 깔고 앉아있다. 할머니들은 안다. 이 여름이 길어도 어김없이 간다는 것을.
귀동냥으로 동네 소식을 듣는다. 이 여름을 나지 못하고 떠난 벽돌집 할머니의 이야기를. 지난달 요양원으로 실려간 혼자된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자식들이 집을 팔아서 요양원비를 댄다는 것을. 젊은 사람들이 집을 고쳐 세를 논다는 얘기를. 그렇게 자신들이 이 동네를 떠날 날이 머지않았다는 얘기를. 이웃의 이야기를 까치처럼 전하는 할머니들의 꿈은 무엇일까.
들깨밭에서 쉬지 않고 풀을 메었는데, 풀은 한걸음 앞서 자라 있었다. 풀 비린내가 진동을 했다. 바람이 불어왔다. 잠시 얼굴을 맡겼다. 손에 검버섯이 활짝 펴 있었다. 풀이 몸을 눕혔다. 이게 꿈인지, 내가 과거를 회상하고 있는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가끔 그럴 때가 있다. 내가 이 시간에 속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느껴질 때. 꿈속에서라도 살아내려고 끝없는 밭의 풀을 뽑고, 또 뽑는. 그러다 뒤를 돌면 꿈이라는 걸 알고야 마는. 할머니가 되는 꿈을 꾼다. 동네 정자에 앉아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고, 장독대에 된장과 간장 항아리 하나쯤은 가지고 있는, 그런 할머니가 되는 꿈을 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