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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친 가족을 마주하다

활기를 잃은 남편과 사춘기 막내, 운동삼우로 살리기

by 디베짱

한 여름의 폭염처럼 뜨겁고 끈적하게 한국에서의 삶을 짓누르던 무게감에 녹진하게 지쳐가고 있을 무렵 딸아이의 대학입시가 치러졌다.

날짜가 다가오니 딸아이도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내가 보기엔 많이 늦었고, 공부하는 모습도 많이 부족해 보였지만...

본인은 가장 적정한 타이밍에 몰입과 집중을 했었나 보다.


그렇게 파도처럼 격정적으로 몰아치던 우리 둘의 생활은 대학입시를 정점으로 조금씩 정리가 되어갔다.

한 가지 큰 숙제를 끝낸 딸아이도 마음이 좀 편안해 보였고, 이제는 온전히 자기가 하고 싶은 것에만 몰두할 수 있으니 좋아 보였다.

나도 내가 원하는 약속을 잘 지켜준 딸이 고맙고 대견하기도 해서 딸에게 꽁해있던 마음도 어느 정도 녹아내리는 듯도 했다.

그렇게 날짜는 지나가고 합격 발표의 날이 다가왔고, 마침내 대학에 합격했다.

나는 기뻤지만, 딸은 의외로 무덤덤했다.


“엄마, 난 약속 지켰어, 엄마도 끝까지 약속 지켜줘!”


1년 반 동안의 생활을 돌아보면서 힘들었지만 배운 게 많은 시기이기도 했다.

딸이 아니었다면 평생 제도권 하에서의 안정된 삶만이 정답이라고 생각하며 편협한 시간으로 세상을 살았을 나에게, 내가 원하는 대로 안정된 삶을 살라고 아이들에게 강요 아닌 강요를 하고 살았을 나에게, 우리 딸은 다른 세상도 다른 방법도 다른 사람들도 있다고 알려주었으니까.


다르다는 것은, 불편한 것도 잘못된 것도 아니라는 것을 나는 딸을 통해 배워가고 있었다.



딸의 대학합격 발표와 고등학교 졸업식이 치러지고 우리는 추운 한국의 겨울을 피해 태국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자퇴를 선언하고, 선풍기가 날아가고, 서로가 서로에게 무기가 되고, 급기야 한국과 태국으로 떨어져 지난 2년 여의 시간을 건너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감회가 새로웠다.

그 시간동안 딸아이는 자기가 하고 싶었던 일들을 맘껏 시도하고 경험했고, 좌절도 하고, 방황도 하다 또 다른 목표를 갖게 되었다.

딸은 3월 대학 입학 전까지 좀 쉬기로 했고, 나는 집으로 돌아와 우리만큼 힘들게 지내고 있는 남편과 막내 아들을 챙겨야겠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태국을 떠날 때 모든 시간이 멈춘 듯 그대로 우리를 기다려줄 것이라 믿었던 남편과 막내 아들의 태국 생활은,,,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남겨진 두 남자의 생활도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참담함이 집안 곳곳을 좀먹고 있었다.


남편은 마치 몸에서 물기가 하나도 없이 바삭하게 마른 나뭇가지처럼 생기가 없었다.

막내 아들은 그 1년 반 사이에 키가 부쩍 자랐고, 폭풍 성장기의 남자아이들에게서 보여지는 비릿하게 마른 몸과 푸석한 머릿결이 딱 봐도 엄마 손길 못미친 아이라는 것을 단박에 드러내 주었다.

말수가 현저히 줄어들고, 눈빛에도 총기가 사라진 듯 초점이 허공을 향하고 있었다.

딸아이를 살리겠다고 한국으로 갔다 오니, 이젠 남편과 막내 아들이 죽어가고 있는 것 같아 또 나는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몸과 마음의 건강을 되찾기엔 걷기처럼 몸을 움직이는 것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을 한국생활 중 몸소 뼈저리게 깨달은 바 있었다.

그러므로 나는 이번에는 남편과 같이 운동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런데이 앱을 알고 나서 간간히 운동을 하긴 했지만 한국의 겨울은 추워서 다시 주춤하고 있었다.

사시사철 더운 이곳 태국에서는 언제든 운동을 할 수 있었고, 나도 다시 달리기를 이어가고 싶었다.

그때 떠오른 사람. 내 남편!

평소 운동도 좋아하고 늘 생기가 넘치던 사람이었는데, 어쩌다 저렇게 물기를 다 잃어버렸는지...

다시 그 나무를 소생시키고 싶었다.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우리 같이 달리기를 해 보면 어떨까?”

남편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그럴까?”


그날 이후 남편은 나의, 나는 남편의 가장 좋은 운동 메이트가 되었다.

집 근처 마프라찬 호수 둘레길은 우리가 함께 뛰는 러닝 코스가 되었고, 붉게 물드는 저녁 노을이 아름다운 그 길 위에서 우리는 숨을 고르며 함께 걸었다.

그리고 서로의 호흡에 귀 기울이며, 어떤 날은 말없이, 어떤 날은 웃으며 그렇게 달렸다.


남편에게 활기를 주고자 함께 운동하기를 제안했지만 사실 내가 더 많은 도움을 받았던 시간들!

내가 포기하지 않도록 곁에서 묵묵히 발을 맞춰준 든든한 러닝 메이트이자 인생 동반자였다.

그러는 동안 남편도 서서히 활력을 되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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