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나처럼 고생하지 않기를...

다 해보고 싶어 3편

by 예일맨

“정말 단 2,3주만이라도, 혹은 발령 전 오롯이 인수인계를 받을 수 있는 기간을 며칠만이라도 보장해 준다면 지금과 같은 공무원들의 인사 시즌 때 받는 스트레스의 총량은 엄청나게 줄어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왜인지는 몰라도 그 어느 조직도 일하는 공무원들의 편의를 생각해서 합리적인 방식으로 인사발령을 내지 않는다. 그저 인력의 모자람, 시간의 촉박함 등을 핑계로 내세워 바로 전날 혹은 3,4일 전에 발령 공문을 올려버릴 뿐이다. 그다음 옮기는 부서에 어떻게 적응할지, 어떻게 인수인계를 받을지는 오롯이 발령자 개인의 몫으로 남겨 두고 말이다”


브런치스토리에서 우연히 읽게 된 옹기종기 작가님의 글 일부이다. 제목은 ‘공무원 인수인계, 이게 최선입니까?’. 같은 공무원으로서 참으로 공감이 가는 내용이다. 공무원은 예기치 못한 급작스런 발령에 따라 바로 다음 날 네비게이션을 켜고 새 근무지를 찾아가야 한다. 처음 가보는 건물에는 역시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내 일이 맞나 싶을 정도로 생소한 업무가 기다리고 있다.


물론, 2~3년 주기의 빠른 순환 근무는 맞지 않는 사람과 환경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탈출구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원하는 근무지에서 하고 싶었던 일을 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이기도 하며, 때로는 경쟁자들을 앞질러 한 발짝 빠르게 갈 수 있는 지름길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도 마음의 안정감을 중시하는 공무원에게 군대 간 동기가 제대하듯 생각보다 빠르게 찾아오는 이 변화는 큰 스트레스가 아닐 수 없다.


나는 공무원으로 재직한 만 11년 동안 (모두 경기도에 속한 조직이기는 하나) 5개의 서로 다른 기관에서 완전히 다른 업무를 하였다. 심지어는 근무지도 다 달랐다. 남양주(북부지소), 양주(북부동물위생시험소), 의정부(경기도 북부청사), 수원(동물위생시험소), 수원(경기도 신청사). 아직도 각 기관에 처음 간 날은 또렷하게 기억난다. 그리고 그 전날에는 항상 잠을 설쳤다.


인사부서는 각 부서와 사전 조율을 거쳐 인사배치를 결정한다. 하지만 여러 가지 변수가 있기 때문에 미리 짜놓았던 대로 정확하게 인사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발령 당일부터 최소 일주일 간은 경기도에 속한 조직 전체가 혼란스럽다. 인사부서는 과 단위로만 사람을 배치하고 그 아래 팀 단위의 배치는 각 과에서 하기 때문에 진짜 자리가 정해지기까지 그 사람은 또 기다려야만 한다.


북부청사로 가게 되었을 때의 일이다. 두 분이 6급으로 승진하여 7급 두 자리가 비게 되었다. 나는 그 두 자리 중 한 자리로 가게 되었는데 아직 결정이 안 났다고 한다. 과장님이 오셔야 확실히 정해지는데 출장 중이셔서 기다려야 한단다. 좁디좁은 사무실 안에 있는 원탁 테이블에서 멀뚱멀뚱 일하는 사람들 뒤통수만 쳐다보며 몇 시간 동안 앉아있어야 했다.


그리고 그다음 근무지인 동물위생시험소에 발령받아 갔는데 아직 팀이 정해지지 않았다고 한다. 넓기도 하고, 있을 곳도 많고 의자도 많은데 도대체 나는 어디에 앉아있어야 할지 모르겠다. 그래서 오후 3~4시쯤 되었나, “조 선생님 바이오연구팀으로 가시면 됩니다” 할 때까지 직원 휴게실에서 휴대폰만 들여다보았다.

여기까지는 약과다. 진짜가 남아있다. 전임자가 홀연히 떠나가고 없다. 가뜩이나 낯설고 정신이 없는데 아무것도 안 하고 멍 때리고 있을 수는 없다. ‘뭐라도 해야지’ 생각을 해보지만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일단 컴퓨터를 켠다. 바탕화면의 가장 잘 보이는 중앙에는 전임자가 말한 그 한글파일 하나가 보인다. 나의 실낱같은 희망. ‘인수인계서’

“일단, 인수인계서를 좀 써놓긴 했는데요, 얼마나 도움이 될지 모르겠어요”

“다음에 시간 내서 한 번 올게요. 좀 더 자세한 것은 그때 말씀드릴게요. 그동안 읽어보고 계시면 될 것 같아요”

막 발령받아 온 사람에게 전임자란 어린아이가 의지하는 엄마와 같은 존재이다. 나에게는 전혀 새롭고 어렵기만 한 업무를 몇 년간 멋지게 해낸 전임자는 무엇이든 물어보면 알려줄 것 같고 마냥 기대고 싶은 든든한 사람이다.


그래서 인사발령 후에도 전임자가 같은 팀 혹은 같은 과에 남아있거나 아니면 같은 건물에라도 남아있다면 그 사람은 정말 운이 좋은 사람이다. 아니, 전화로라도 편하게 물어볼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것만으로도 정말 감사해야 할 일이다.


옹기종기 님의 말처럼 공무원 조직의 인수인계는 그리 만만치 않다. 그 든든한 전임자도 당장 새로운 곳에 가서 적응하며 배워야 하는 후임자가 된다. 시급하게 처리해야 하는 업무가 있을 수도 있고 출장일이 많아서 전화를 받기 어려울 수도 있다.


따로 시간을 내어서 그간 했던 업무에 대해 차분하게 전수를 해주는 것은 절대 쉽지 않은 일이다. 업무 시간 중에 후임자에게 인수인계를 하러 오려면 새로운 부서장의 허락을 받아 출장까지 달고 와야 한다. 딱딱한 공무원 사회에서 이것은 적잖이 부담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이런 현실을 잘 아는 대부분의 공무원들은 전임자의 자세하고 친절한 인수인계를 기대하지 않는다. 그저 인수인계서만이라도 어느 정도 써서 남겨주고 가기만을 바란다. 기껏해야 한 두 장이라고 해도 전임자의 노하우와 꿀팁이 담긴 인수인계서는 후임자에게 꽤나 큰 도움이 된다. 지금 당장 무엇을 어떻게 해나가야 할지 막막한 후임자에게 있어 전임자의 인수인계서는 그저 빛이다.


당연히 컴퓨터 화면으로 보는 것은 인수인계서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큰 글씨로(전임자가 빨간색이나 파란색으로 써놓은 것이 있다면 컬러로) 인쇄해서 연필로 새까맣게 밑줄을 쳐가며 한 글자, 한 글자 놓치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마치 시험 전 날 선배가 물려준 족보를 보듯 말이다.


북부청사에 배치받아 축산물안전팀에서 일할 때가 직장 생활 11년 동안 가장 공부를 많이 해야 했던 기간이었던 것 같다. 기본적으로 「축산물안전관리법」을 줄줄 꿰야한다. 거기에다가 “식품공전”이라고 부르는 「식품 등의 기준 및 규격」, 「식품 등의 표시기준」, 「식품 및 축산물의 안전관리인증기준」, 근무할 당시에 새로 생긴 「식품 등의 표시·광고에 관한 법률」 등 축산물가공업의 허가와 행정처분, 그리고 축산물가공품 관련 민원을 처리하기 위해 수많은 법률과 규칙 등을 알아야 했다.


물론 다 외우지는 못하더라도 민원인이나 시·군에서 물어오는 것들을 신속하게 답하기 위해 해당하는 내용이 어디에 있는지 정도는 알고 있어야 했다. 단지, 나와있는 내용을 알려주는 것은 그나마 간단하다. 그런데 그들이 요구하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 “해석”이었고 “판단”이었다.


공부를 많이 해오신 민원인 중에는 법령을 출력해 와서 밑줄을 치며 자신의 주장이 맞다고 되려 나를 가르치는 분도 있었다. 규정에 확실히 “해야 한다”라고 되어있지 않으면 최대한 피하려고 노력하는 분들이 많았다. 또한, 원하는 답을 말로 내뱉기만을 기다리며 ‘공무원인 당신이 분명 그렇게 말했으니 내 책임 아니다’라는 식으로 대화를 유도하는 분들도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위반사항 적발”과 “행정처분”이라는 업체에 불이익을 주는 업무를 해야 했기 때문에 그것에 파생된 많은 일들도 감당해야 했다. 불시 점검과 위반사항 적발 시 증거 확보 및 확인서 징구, 행정처분 및 과태료 부과, 과징금 전환, 청문, 행정심판, 행정소송 등 생소하기도 하고 업체의 민원과 불복에 항상 대비해야 하는 일들의 연속이었다.

어느덧 연차가 8년 정도 되니까 이젠 7급 최고참이다. 정기인사 직전에는 근무성적을 평가하여 승진 후보자 순위를 매기는데 거의 1~2등이다. 승진을 목전에 두고 있다는 뜻이고 축산물안전팀에서 탈출할 수 있는 희망의 빛줄기가 보이기 시작한다는 뜻이다.


끝이 보이자 그동안의 내 삶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선배들이 많이 알려주고 도와줬지만 그래도 지독하게도 힘들었다. 짧은 인수인계 시간 동안 선임은 그것을 다 내게 알려줄 수도, 나는 다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스스로 찾아서 공부해 가며 깨친 것들이 많았다.

'내가 나가면 곧 다른 사람이 내 자리로 올 것이고, 같은 팀 직원들도 머지않아 바뀔 텐데...' 내가 힘들게 배운 것들을 그 사람들도 똑같은 과정을 겪으며 배울 것을 생각하니 머리가 아찔했다. '2년 8개월 동안 일하며 쌓은 것들을 잘 모아서 전달하면 그분들이 조금 덜 고생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한편 내가 힘들게 터득한 노하우를 그대로 썩히지 않고 무엇이라도 남겨놓고 가고 싶었다.


하나하나 정리를 해가기 시작했다. 내가 해온 업무를 크게 나누고 또 그것을 작게 세분화했다. 그 업무의 근거법령은 무엇인지 적고, 업무를 처리해 나가는 순서와 방향, 내가 실수하며 배운 노하우, 그리고 민원인이 자주 하는 질문 몇 가지 등을 최대한 정성스럽게 기록했다.


그리고 팀에서 공유되던 크고 작은 업무 지침들과 내가 보기 위해 조금씩 만들어놓았던 업무 매뉴얼을 전부 다 모아서 업무정리 내용과 연계하여 볼 수 있도록 맨 뒤쪽에 차곡차곡 붙여놓았다. 시간이 날 때마다 수시로 집필(?)을 하다 보니 수십 장의 업무 인수인계서가 만들어졌고 내 다음 세대들에게 자랑스럽게 전달할 수 있었다.


그 팀을 떠나고 3년이 넘게 지났다. 그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축산물안전팀이 했던 업무 중 일부가 축산물유통팀으로 넘어가기도 했고, 경기 남쪽 지역을 담당하도록 축산물안전 2팀이 새로 생겨나기도 했다. 더불어 수 차례 인사이동으로 내가 일할 당시에 있던 동료들은 다 다른 곳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그런데 내가 남기고 온 자료는 아직 남아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나 보다. 안전팀을 거쳐 간 여러 사람들과 바뀐 업무를 익히기 위해 내 인수인계 자료를 참고했던 유통팀의 몇몇 사람들로부터 감사의 인사를 받는다. 안전 2팀의 팀장님은 바쁜데 언제 그렇게 만들었냐고 칭찬해 주시고는 “나도 일하면서 자기가 만든 그 자료를 더 풍성하고 정교하게 다듬어서 후임에게 물려줄 거야”라고 말씀하신다.


놀랍다.


틈틈이 작은 노력을 들여 남기고 간 흔적이 여전히 나 대신 다른 사람을 돕는 큰 역할을 하고 있다니...


벅차오른다.


내 흔적이 사라지지 않고 다음 사람들의 손에 전해지고 다듬어져 대대로 남을 것을 상상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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