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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 집안을 책임지다.

시집살이 만만치 않더라

남자를 따라 방으로 들어온 소녀는 왠지 안심이 되었다. 처음 보는 사람이지만 아버지의 말처럼 이 사람과 평생을 살아야 한다고 하니 덜컥 믿음부터 생겨버렸다. 먼저 분위기를 이끄는 그의 행동에 더더욱 안심이 생겼다.

"먼 길 온다고 불편했지요? 오늘은 푹 쉬소. 밖은 신경 쓰지 말고."

그러고선 눈앞에서 자킷을 벗고 옷을 갈아입었다. 소녀는 바닥에 앉기에도 불편한 양장 덕분에 서지도 앉지도 못하고 문 쪽으로 바짝 붙어 고개만 숙였다.

"임자도 옷부터 갈아입으소."

남자는 요 자리를 폈다. 실은 그 좁은 방안에는 벽마다 남자의 습작처럼 쓴 붓글씨가 두껍게 걸려있었고, 작은 책상과 남자의 책 외에는 별 짐도 없었다. 옷을 어디서 어떻게 갈아입나를 망설이자 그가 먼저 말했다.

"내 이 요에 눈 딱 감고 있을 테니 편하게 옷부터 갈아입으소. 좀 쉬어야 하지."

남자의 말에 들고 온 봇짐에서 편한 치마저고리를 꺼냈다. 새 옷도 있었지만, 입던 옷을 깨끗이 빨아온 옛 옷이 왠지 더 편할 것 같아 입었다. 남자는 속으로 여자가 마음에 들었다. 키도 크고 큰 눈에 다부진 입매가 왠지 믿음직스러웠다. 든든했다. 그래서 '임자'라는 말도 망설임 없이 나왔다.

따지고 보면 서로 설렌다던지 사랑에 빠졌다던지 그런 청춘의 이야기는 없었지만 남자와 여자로 평생 같이하는 동반자로는 서로 의지하기로 마음먹은 그런 의리 깊은 사이였다. 어쩌면 남자도 어릴 때 여윈 엄마의 빈자리, 소녀도 엄마를 대신해서 자란 환경이 같다는 것을 알기에 더 믿음이 생겼는지도 모른다.

어느새 깜깜해지고 소녀는 더 이상 소녀가 아니라, 한 가정의 집사람이자 며느리가 되었다.


날이 밝았다. 남편은 옆에서 코를 골며 깊은 잠에 빠졌고 이제 막 동이 트려 한다. 바깥에서 '앵앵' 기침 소리가 들렸다. 어제 봤던 그 젊은 여자의 목소리 같았다. 얼른 옷을 고쳐 입고 뺨을 두어 번 찰싹이며 잠에서 깨어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어제 안방에 앉아 있던 젊은 여자가 맞았다. 어제 자기 전 남편이 말한 아버지의 세 번째 부인이자 여인의 시어머니였다. 보아하니 여인과는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여인보다 딱 10살이 많은 젊디 젊은 시어머니였다.

집에 일하는 사람들도 있건만 시어머니는 며느리에게 아침부터 잔소리를 해댔다.

"시집온 지 하루 만에 내 이런 말 아침부터 하기 싫으네만, 자네가 이제 이 집 며느리니 살림은 알아야지. 치마저고리 입고 무슨 일을 한다고. 머리 똑바로 빗고 고쟁이 입고 얼른 나오니라."

시모는 얼룩지고 몇 군데 천으로 덧대어진 바지와 바지끈을 던져줬다. 여인은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쪽지고 나왔다. 그러자 시모는 하얀 천을 가져와

"하이고, 밥솥에 머리카락이라도 들어가려면 어쩌라고."

하며 여인의 머리에 남동생이 시집갈 때 준 비녀를 뽑고는 자신이 하고 있던 목비녀로 바꾸고 머리를 그 천으로 가리려 묶었다. 차마 '제 물건 다시 주세요.'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동생이 준 귀하디 귀한 은비녀였다. 일제 치하라 구하기도 어렵고, 여차하면 '누구야 혹시 모르니깐 이거는 가지고 있다가 궁할 때 쓰래이.'하면서 아무도 모르게 손에 쥐어준 것이었다.

억울하다가거나 눈물을 흘릴 새도 없이 부엌으로 들어가 매운 연기를 마시며 솥에 쌀을 담고 물을 올렸다. 바쁘게 부엌에서 움직이는데, 시모는 옆에서 웬 고기 덩어리를 썰고 있었다.

고래고기였다. 경상남도 울산 지방에서는 마을에 축제가 생기면 고래고기를 말려놨다 썰어 먹었다. 너무 귀한 고기라 일꾼도 함부로 만질 수 없다. 오직 안주인 만이 고래고기를 썰 수 있는 권한이 있다. 울산에서 고래고기는 그런 존재였다. 고기 덩어리를 썰면서 시모가 결국 대놓고 싫은 소리를 한다.

"입하나 느는 게 뭐 좋다고 귀한 괴기를 이렇게 많이 썰라 하니."

시모가 말하는데 대여섯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가 막 일어난 듯 부엌으로 와

"누구야, 물."

이라고 한다. 그러자 시모가 말한다.

"누구야가 아니라 형수님!"

알고 보니 그 아이는 시아버지의 두 번째 부인이 놓고 출가한 아이였다. 물을 주면서도 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식 뻘의 세 번째 부인, 엄마는 출가해서 동네 천덕꾸러기 같은 그 아이. 물을 주면서도 한 마디 따뜻하게 건네고 싶었다.

"하이고, 배고프겠네. 조금 기다리소. 내 맛있게 밥 할게 예, 도련님."

아이는 발간 볼에 웃음을 띄우며 달려갔다.

시집의 가정사는 좀 복잡했다. 남편은 시아버지의 정실부인이 낳은 가문의 종손이다. 남편 위로 있는 누나는 부산의 돈 많은 장사군에게 시집을 갔다. 그리고 첩으로 있던 두 번째 부인이 낳은 아이가 저 꼬마 도련님이고, 얼마 전 세 번째 부인이 지금의 시어머니인 것이다. 시어머니는 아직 자식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그런지 나이 차이 얼마 나지 않은 며느리가 부담스럽기도 했고, 본인의 자리가 위태롭기도 했다. 아들만 낳으면 진짜 부인이 되는 아들 귀한 경상도 밀양 박씨네 판도공파파의 가풍은 그랬다. 누가 먼저 아들을 낳는지에 따라 이제는 며느리가 시어머니 보다 먼저 집안사람이 될 수 도 있기에 시모는 조바심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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