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튤립과 바이러스

LA TULIPE by BYREDO

나는 튤립을 좋아한다. 꽃봉오리가 생길 때부터 꽃이 다 떨어질 때까지 인도사람의 터번 (실제 튤립의 어원이 Turban이기도 하다) 모양 같이 생겼다가 조금씩 벌어져 활짝 핀 꽃잎 6장이 하나씩 떨어질 때까지 관찰할 수 있는 과정이 매우 재미있는 꽃이다. 추운 겨울을 구근 상태로 지내다가 날씨가 제법 쌀쌀한 초봄에 피는 것이 물러 터진 나와는 다르게 강인함을 보여주는 것 같아 닮고 싶은 꽃이기도 하다.


20180502_012804.jpg 네덜란드 국화(國花)인 튤립이 피는 계절이 되면 비행기 안에서도 꽃이 핀 것이 보인다.

튤립은 화훼선진국인 네덜란드에서 역사적, 경제학적 관점에서도 중요한 식물이다. 원래 중앙아시아 식물인 튤립이 1600년대 네덜란드에 소개되면서 다른 꽃과는 구별되는 그 터번 같은 모양 덕분에 인기가 많았다. 찾는 사람이 많아지니 가격이 천정부지로 올랐다. 이를 "튤립 공황(tulipomaniacs)'이라고 하는데, 자본주의 최초의 버블 경제 현상 (the paradigm of economic bubble)으로 보고 있다. 특히, 희귀종으로 취급하던 Semper Augustus라는 튤립이 가장 비쌌다. 아마 한 번쯤은 누구나 봤을 알록달록하고, 꽃잎의 끝이 주름이 잡혀 있는 모양의 튤립이다.


그림1.jpg Semper Augustus-실은 이 꽃은 TBV 중 덜 치명적인 바이러스의 일종에 감염되어 생긴 돌연변이이다.



그러나 이 Semper Augustus라는 튤립이 비밀은 바이러스에 있었다. 유난히 흉작인 밭에서 매우 드물게 한 두 송이씩 꽃을 틔워, 마치 네 잎클로버처럼 랜덤 하게 얻을 수 있어 귀한 꽃으로 취급받던 Semper Augustus는 사실 식물의 모자이크 병 때문에 생긴 돌연변이였다. 식물의 모자이크 병은 잎이 기형적으로 엽록소를 생성하지 못해 얼룩덜룩해져 결국은 꽃을 못 피우고 죽어가는 병이다. 백합과 튤립 같은 식물에 기형을 유발하는 Tulip Breaking Virus (TBV)는 진딧물과 같은 곤충으로부터 식물에 옮겨져 식물에 감염이 된다. 바이러스는 세포막이 아니라 세포벽으로 단단하게 무장한 식물에도 감염이 되는 것이다. 특히나, 동물에는 있는 면역체계가 식물은 이 세포벽 하나로 버티고 있으니 넓은 밭이 바이러스 때문에 초토화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런데, 당시 네덜란드는 구근을 심기 전부터 상인들이 꽃값을 지불했다고 하니, 이 Semper Augustus는 마케팅 차원에서도 귀한 대접을 하도록 유도된 면이 있다. 더불어, 튤립은 온기에 약하고, 꽃을 볼 수 있는 시간이 길지 않다. 사람 손이 오래 닿으면 빨리 지는 꽃이기도 하다. 그러니, 오래 보기 위해 튤립을 그림으로 간직하길 원하는 귀족들이 많았고, 그 수요 덕분에 네덜란드의 회화가 발전한 시기이기도 하다.


서양인들은 튤립을 shy 한 꽃이라고 한다. 사람 손의 온기에 약하고, 절화는 오래 보지도 못할뿐더러, 이른 봄 쌀쌀한 시기, 산책하기 아직 이른 시기에 피는 꽃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향이 없는 꽃이기에 정말 눈에 띄는 것을 싫어하는 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 꽃이 주는 이미지는 강렬하다. 화려한 색깔, 동그란 모양이 알록달록한 사탕을 연상케 한다. 왠지 튤립이 향이 있다면 사탕처럼 달콤하고 속삭이듯 은은한 향일 것 같다.


그런데, 사람이 느끼는 감정은 비슷한가 보다. 조향사 Ben Gorham은 튤립을 좋아했고, 이를 향으로 표현하고 싶었다고 한다. 그 강렬한 색깔과 수줍은 듯한 이미지, 그리고 봄이 알리는 느낌을 담아 Jerome Epinette와 함께 튤립향을 만들었다. 존재하지 않는 향을 이미지화하여 다시 향으로 표현한 것이다. 오감 중 후각과 시각의 전환을 한 이 향은 내게 큰 영감을 주었다.

20180502_121006_HDR.jpg 세계에서 가장 큰 정원인 네덜란드 쿠겐호프의 튤립 축제

나는 글로 내 생각을 표현하지 못할 것이라고 믿었다. 글은 너무 단편적이라 믿었고, 내 생각은 복잡해서 터져나갈 것 같았다. 그런데, 완전히 다른 감각을 전환하는 이 튤립향이 나에게 글을 적어보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수줍은 튤립이 용기 없는 내게, 그들이 추운 겨울을 구근으로 나고, 향이 없어도 활짝 피지 않아도 봄을 알리는 것처럼, 나에게도 아픈 상처를 그리고 부끄러운 일들을 글로 적어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BYREDO의 LA TULIPE은 사탕같이 달콤하고, 어디선가 맡아본 꽃향기 같지만 한 번 맡으면 '아, 그 향!'하고 떠오를 정갈한 향기를 가졌다. 프리지어 꽃 향기를 탑노트로 하고 있어서 그런가 싶지만, 미들 노트에 싱그러운 튤립의 잎냄새를 섞어 풀향도 약간 나고 마지막에는 비누향 같은 냄새가 오래 지속된다. 혹시, 본인이 무언가를 하기에 너무 부끄럽다면, LA TULIPE by BYREDO를 추천한다. 세상 달콤한 사탕을 먹고 기분 좋은 용기를 내는 것처럼.

캡처.JPG 홈페이지에서 가져왔습니다.

[References]

1. Lesnaw, Judith A., and Said A. Ghabrial. "Tulip breaking: past, present, and future."Plant Disease 84.10 (2000): 1052-1060.

2. Dekker, Elise L., et al. "Characterization of potyviruses from tulip and lily which cause flower-breaking." Journal of General Virology 74.5 (1993): 881-8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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