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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민 Dec 27. 2022

노(老)감독의 진심

2022 기자의 세상보기 공모 '장려상' 수상작(한국기자협회 주최)

"잘 있었어요? 요즘은 어때요?"

가족들과 보내는 평온한 주말 오후. 휴대전화가 울렸다. 전화기 화면을 보니 그였다. 김호 전 축구감독(78). “네 감독님. 식사는 하셨나요?” 어느덧 여든을 바라보는 노(老) 감독과의 통화내용은 늘 같다. 축구국가대표팀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소식을 주고받고 전날 새벽 열린 유럽축구 경기로 이야기의 꽃을 한창 피운다. 그리곤 다음 주 평일에 점심 약속을 잡고 만나 못다 한 이야기보따리를 푼다. 우리 축구의 대들보, 손흥민이 골이라도 넣은 날에는 통화시간은 기본 30분을 넘긴다. 난 그의 전화는 무조건 받고 서울에서 멀다면 먼 용인까지 차를 몰고 가서 그와 만난다. 모두 마음이 시켜서 한 일이다. 김 감독은 내게 매우 특별한 사람인지도 모른다. 난 2019년 아버지를 하늘나라에 보내드려야 했고 태어났을 때는 할아버지가 곁에 계시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나도 모르게 김 감독에게 가족의 정(情)을 느끼고 있을 거란 생각도 해봤다.

한편으론 그와 축구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내겐 하나의 탈출구라서 그렇지 않나 한다. 난 기자를 시작할 때부터 축구 전문인을 꿈꿨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축구를 못해서 친구들 사이에서 따돌림을 당한 소년은 초등학교 6학년 때 학교 대표 축구선수가 돼 전국 대회에 나갔고 학생의 본분인 공부보다는 축구로 내 존재를 각인시켰다. 조용하고 소심했던 성격도 축구를 계기로 바뀌었다. 축구가 나를 바꾼 것이다. 승패가 갈리는 그라운드 전쟁을 통해서 인생도 배웠다. 대학에 가서는 공부하고 도전해서 결국 스포츠 기자로 축구 기사를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모든 인생이 항상 순탄하게 흘러가지 않듯, 회사에서 스포츠부서가 돈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없어지며 난 사회부로 자리를 옮겨야 했다. 그 후로 아직까지도 축구판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서 김 감독은 내 축구 갈증을 해소해주는 은인 같은 존재였다.

그래서인지 언젠가 그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그러다 공모전이라는 좋은 기회를 이용해 한 번 써보자고 마음먹었다.

축구판에서 김호 감독은 어떻게 보면 꼰대에 가깝다. 그의 말은 거칠고 직선적이다. 한국 축구를 걱정해 관계인들과 후배들을 향해 내뱉는 말들은 가끔 오해를 부르기도 하고 적들을 만든다. 하지만 표현의 문제일 뿐, 난 그의 진심만은 꼭 곳곳에 닿았으면 좋겠다. 부족한 실력으로 어수선하게 쓰고 있는 내 글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란다. 어떤 이들은 김호 감독의 진심을 읽으면서 용기를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무시받거나 소외돼 온 우리의 어른들, 꼰대들을 향한 응원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럴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내가 이 글을 쓴 이유로서 충분하다.  



1. 첫 만남


2016년 11월 어느 날. 데스크에서 취재 지시가 떨어졌다. ‘공부하는 운동선수’에 대해서 전문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라는 것이었다. 학교 운동부 선수들의 불투명한 미래를 위해 운동과 공부도 병행해야 한다는 주장들이 나오는데, 이 방법이 과연 옳은지를 짚어 보는 기획이었다.

데스크께선 김호 감독을 꼭 만나보라고 권했다. 그가 해줄 말이 많을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연락을 하고 2016년 11월 22일 용인축구센터에서 같은 부서 선배와 함께 김 감독과 만나 인터뷰했다. 그는 용인축구센터 총감독으로 일하면서 관내 유소년 선수들의 훈련을 도와주고 축구도 가르쳤다. 기대와 걱정을 안고 도착한 센터에서 김 감독은 미소를 지으며 “어서 오세요.”라고 인사했다. 그리곤 그의 집무실에서 약 4시간 동안 인터뷰했다. 우리의 대화는 길어졌고 체력은 점점 떨어졌다. 그러던 중 김 감독은 내게 물었다. 그의 물음에 난 생기를 다시 찾았다. “고향이 어디요? 말투가 경상도 같은데.” “저는 거제도입니다. 거제도 아십니까.” “잘 알죠. 내가 통영 사람인데.” 그리곤 김 감독은 창밖을 바라봤다. “거제도. 좋지. 내가 가끔 통영에 팀을 이끌고 전지훈련을 가면 거제도 장승포 바다를 한 번씩 갔었다고. 그 근처에 자갈밭 해수욕장 하나 있죠?” “학동이라는 곳에 몽돌해수욕장이 있습니다.” “거기를 내가 많이 갔다고. 돌에 비치는 햇살이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다니까. 지금도 가보면 예쁠 거야.” 김 감독의 눈빛이 둥근 자갈에 반사돼 눈으로 들어온 햇빛처럼 반짝였다.

그의 고향은 통영이다. 통영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공을 잘 찼다. 초등학교 때부터 선수로 발탁돼 통영중, 통영고에서 축구를 했고 이후 진주고, 부산 동래고로 옮겼다. 그런 그가 갖고 있던 향수(鄕愁)를 내가 자극했던 것 같다. 인터뷰 뒤에도 김 감독과 난 이래저래 만났다. 축구 이야기와 함께 고향에 대한 추억도 나눴다. 거제에서 온 청년과 통영 출신 노 감독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2. 야인


김 감독은 지금 축구판에서 야인(野人)이다. 어느 진영도 가까이하지 않고 홀로 있다. 그래서 그는 자유롭게 우리 축구를 향해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는다. 그의 말이 때론 너무 날카로워서 축구인들을 아프게도 한다.

하지만 모두 그가 축구를 사랑하기 때문에 내뱉는 진심이다. 그가 걸어온 길을 돌아보면 이해가 간다. 김 감독은 늘 우리 축구의 질적 성장을 바랐다. 롤모델로 독일을 동경한다. 독일 프로축구 분데스리가는 유럽 5대 프로축구리그 중 하나다. 늘 실력 좋은 유망주들이 발굴되고 바이에른 뮌헨 같은 강호들은 수십 년째 유럽 무대를 호령하고 있다. 독일 분데스리가는 처음에 작은 규모로 시작했다. ‘새미 프로’였다. 경기장 등 인프라를 처음에는 작게 시작해서 점차 키워나갔다. 주춧돌 등 기초를 천천히 잘 쌓아서 기둥을 올리고 멋진 집을 만든 것이다. 우리는 2002년 한일월드컵 때 만든 경기장을 활용해 프로축구를 운영하고 있다. 아직 기초도 다져지지 않은 가운데서 너무 큰 경기장과 인프라를 가지고 프로축구를 어렵게 이끌어가고 있다고 김 감독은 자주 지적했다. 좀 더 실용적인 전환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우리 프로축구가 그렇게 살아나면 축구대표팀의 경쟁력도 자연스럽게 높아질 것으로 봤다.

1992~1994년 축구대표팀 사령탑일 때의 아픈 기억도 있다. 김 감독은 1992년 7월 축구대표팀을 맡아 아시아 예선을 통과해 1994년 미국월드컵에 나갔다. 유럽 강호인 스페인과 2-2 무승부, 독일과는 잘 싸운 끝에 2-3으로 지는 등 선전을 펼쳤지만 2무1패로 16강에는 오르지 못했다. 당시 우리 축구협회가 대표팀을 잘 지원해주지 못했다. 노하우와 인프라가 없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협회의 일부 임원들은 김 감독과 선수들에게 갑질 행태를 보인 일도 있다고 한다. 선수들과 자신이 미국에서 들인 노력과 성과가 협회의 부당한 처사로 인해 폄하되는 것을 김 감독으로서는 참기 힘들었던 것 같다. 세계무대에서 자랑스럽게 활약한 대표팀이 다시는 협회의 사리사욕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모습을 그는 늘 우려하고 있고 그래서 쓴소리도 멈출 수 없었을 것이다.


3. 식사


축구 지도자 중엔 거제도와 인연이 있는 사람이 좀 있다. 서정원 감독이 대표적이다. 서 감독은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났지만 거제에 있는 연초중, 거제고에서 선수 생활을 했다. 당시 대우그룹이 축구 발전을 위한 투자 일환으로 연초중, 거제고에 좋은 선수들을 많이 불렀는데 서 감독도 그중 한 명이었다.

서 감독은 1994년 미국월드컵에 김호 감독이 이끄는 대표팀에 뽑혀 나갔고 수원 삼성에서도 1999~2003년 김 감독과 있었다. 거제와 통영 사람의 만남이라면, 서 감독과 김 감독 간 관계가 끈끈했을 법도 한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미운 정, 고운 정이 다 들어서 그런지 김 감독은 “(서정원 감독이) 내게 연락을 잘 안 한다”라고 했다. 선수 시절 김 감독과 함께 한 인연이 있는 현역 지도자들 대부분이 그렇다. 1994년 미국월드컵에 함께 나간 황선홍, 홍명보 감독 등과도 교류가 거의 없다. 그래도 김 감독은 그들을 늘 응원한다. 서 감독은 지금 프로축구 청두 룽청 사령탑으로 일하고 있는데 김 감독은 내게 “서 감독은 요즘 어때요?”라고 간혹 물었다. 가장 인상 깊은 말은 "죽기 전에 꼭 94년 미국월드컵 멤버들과 모여 식사자리를 할 생각"이라고 한 것이었다. 김 감독은 “내 사비로 식당 하나 빌려서 멤버들 모아놓고 식사를 할 생각이다. 그때 되면 김 기자도 꼭 오라”고 했다. 이유는 1994년 미국월드컵이 끝난 후 대표팀이 별도의 해단식도 못하고 해산해서다. 김 감독은 미국에서 귀국한 후 16강에 오르지 못했다는 이유로 자진 사퇴했다. 그러면서 대표팀은 월드컵 후 서로를 격려하고 그 뒤를 기약하면서 대회를 마무리하는 시간을 갖지 못했다. 김 감독은 “그때 밥이라도 같이 못 먹었던 것이 사는 내내 마음에 남는다”라고 했다.


4. 사진

   

무슨 일을 하든 남는 건 사진인 것 같다. 아직 김호 감독과 찍은 사진이 없다. 언젠가 그와의 인연을 오래 추억하기 위해 사진을 찍자고 할 참이다. 그의 추억 한 자락에 내가 남는다면 꽤 영광일 것도 같다. 사진에 관해서라면 김 감독의 진심이 보이는 사진 하나가 있다. 김 감독의 휴대전화 배경사진이다. 그의 아들이 올려줬다고 했다. 김 감독이 축구국가대표 선수 시절 찍힌 흑백사진이다. 메신저 프로필 사진도 역시 같다. 사진 속 그는 왼쪽 가슴에 태극기를 달았고 조금 긴장돼 보인다. 하지만 날카로운 눈빛은 처지지 않고 앞을 응시하고 있다. 정확하진 않으나 그가 1965년 처음 대표팀에 발탁돼 경기에 나갔을 때인 것 같았다. 김 감독은 1965~1973년 대표팀 중앙 수비수로 71경기를 뛰었다.

그는 사진을 수시로 확인하며 늘 우리나라를 대표했다는 사실에 감사하면서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축구를 “내 운명이었다”라고 말했다. 축구에 대해선 진심이었고 마음을 다해 우리 축구를 위해 헌신했다. 어쩌면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어르신들의 마음이 같을 지도 모른다. 어른들, 꼰대 분들의 잔소리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란 생각도 든다. 거기엔 걱정과 진심이 담겼다. 우린 그 마음을 제대로 받아서 살고 있을까. 우리 축구도 마찬가지다. 잔소리는 쓰겠지만 김 감독의 진심만은 모두에게 꼭 전해지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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