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게 기적인 걸까. 두 사람이 만나 사랑을 하고 그 사랑의 결실로 토끼 같은 자식들이 세상에 빛을 보고 또 그들이 각자의 씨앗을 퍼뜨려 이 세상 아름다운 꽃들로 가득 차게 했다. 아 가족탄생의 신비여. 돌려 말했지만 우리 집안 이야기다. 나의 증조할아버지, 할머니가 6남매를 낳고 그 6남매가 또 각자 5~6남매를 낳고 또 그 남매들이 흥부처럼 자식들을 졸졸이 낳았다. 2명으로 시작해 100명의 대가족이 생겨났다. 물론 이 또한 계속 현재진행형이다. 자식이 자식을 낳고 또 자식이 자식을 낳는 무한 증식의 과정. 물론 슬프게도 나에게서 그 과정이 끊기겠지만.
이 기적을 두 눈으로 보게 된 것은 우리 가족이 이모할머니의 구순잔치에 초대받은 주말 밤이었다. 연회장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외할머니랑 비슷비슷하게 생긴 분들이 세포 분열을 하듯 여기저기 웅성웅성 옹기종기 오글오글 계셨다. 나의 증조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사랑의 결과로 팔십 명이 넘은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 들어와 있지만 아는 얼굴이 없었다. 심지어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한 분들도 계셨다. 우린 그저 누구의 딸, 누구의 손녀, 누구의 증손자로 서로서로 통성명하고는 '피는 물보다 진하다' 공통점 하나로 금세 가족애와 소속감을 느꼈다. 아우형님 우리 이제라도 자주 연락합시다 로 지키지도 않을 헛된 약속을 하며 훈훈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나는 5녀 1남의 첫째 딸인 우리 외할머니가 낳은, 5남 1녀 중 유일한 딸인 엄마가 낳은, 1남 1녀의 유일한 딸이다. 딸의 딸의 딸인 셈이다. 할머니의 유일한 외손녀라는 타이틀을 가진 나를 친척들이 무척이나 반겨줬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할머니는 있는 사실 40%에 과대 포장의 포장의 포장을 거쳐 짝퉁을 명품 100%로 만든 다음, 나를 세상에 둘도 없는 효심 가득한 차아아암 착한 손녀라고 자랑하고 다니셨다. 할머니는 잔치에 오신 어른들과 육촌들에게 나를 일일이 인사시키셨다. 언제나 그런 것처럼 모두들 나의 나이, 직업, 결혼여부에 관심이 많았고 그럴 때마다 나는 반복기능이 켜진 라디오처럼 같은 대답만 늘어놓았다.
이모할머니: 오. 네가 외손녀구나. 드디어 만나보는구나. 나이는 몇 살인고? 직장은 다니고 있고? 결혼은 했고?
나: 안녕하세요. 나이는 올해 만 36살이고요. 예전에 어학원 일하다가 지금은 잠시 쉬고 있어요. 아직 결혼은 안 했어요.
2분 뒤,
처음 보는 외삼촌: 어머나 반갑다야. 이야기 많이 들었다. 올해 몇 살이지? 일은 하고? 결혼은 했을까?
나: 아 안녕하세요. 나이는 36살이에요. 직장 다니다 1년 휴직하고 집에 쉬고 있어요.. 결혼은 아직 안 했어요.
2분 뒤,
처음 보는 이모: 어-. 안녕. 처음 만나네. 큰집 언니 딸이지? 올해 몇 살이니? 직장은? 결혼은?
나: 안녕하세요. 저 올해 36살이고요 지금 쉬고 있어요. 결혼은 아직이요.
3분 뒤,
누군지도 모름: 아이고 네가 걔네. 그래. 올해 몇 살인고? 직장은 다니고? 결혼은?
나: 예예. 곧 40살입니다. 예예 무직입니다. 예예 결혼 못했습니다.
40분 동안 이어진 노처녀백수 커밍아웃에 지질대로 지친 나는 누구라도 눈이 마주치거나 내 어깨를 툭 치기만 해도 기계적으로,
I'm 곧 40살. 무직. 노처녀.
너덜너덜. 제발 그만해. 날 좀 놔줘.
이씨네 유일한 외손녀, 맛이 갔네 갔어.
신나는 분위기 조성을 위해 노래자랑대회 상품으로 제비 뽑기 이벤트도 있었다. 나는 음치라 사람들 앞에서 노래하는 걸 불편해하는데 현금, 상품권, 손목시계, 이불 등 상품이 꽤나 푸짐했다. 잠시 눈이 멀어 한번 철판 깔고 무대위에서 개다리를 한번 떨어볼까 싶다가도 처음 뵙는 어르신들 앞에서 괜히 나댔다가 쯧쯧 이씨네 외손녀는 저러니 백수에 노처녀지 역시 관상은 과학이야 소리 들을까 봐 박수로봇처럼 가만히 앉아서 남의 재롱에 방청객처럼 입나팔을 불었다.
굳이 내가 나대지 않아도 많은 분들이 자진해서 혹은 지목받아 무대로 나와 흥을 돋웠다. 다들 흥겨운 분위기에 취해 대부분 신나는 트로트를 불렀는데 오늘 처음본 젊은 육촌동생이 갑자기 랩노래를 고르더니 평균연령 65세 앞에서 알아듣지도 못할, 세상을 향한 분노 옹알이 랩을 신나게 싸질렀다.
사촌동생의 절규에 가까운 외침이 나이 드신 어르신들 귀에는 내려 꽂히진 않았다. 아마 육촌동생이 구순잔치와 쇼미 더머니 오디션 장소를 헷갈린 듯했다. 랩도 더럽게 못했다. 당신은 우리와 함께 하실수 없습니다. 패자부활전으로도 소생못할 처참한 실력.
내 옆에 앉아계시던 우리 93세 할머니가 조심스럽게 나에게 물었다.
"저 아는 신들렸냐."
비트를 맛깔나게 쪼개는 사촌동생의 두둠칫 머리 흔들거림과 허공을 향해 손가락질하는 그의 힙합스러움을 보고는 할머니는 꽤나 문화충격을 받으셨나보다. 나는 '그런 게 아니라 저게 요즘 유행하는 힙합이라는 건데 젊은 애들이 빠른 음악에 맞춰 말하듯 하는 노래 방식이에요 요즘 유행이에요 인기 많아요'라 말하기 귀찮아서.
"... 예 그런가 봐요. 안타깝네요" 라 말했다.
미안해. 오늘 처음 본 육촌동생.
90대 할머니가 받아들이기엔 너무 선구적이었어.
근데 넌 안 되겠더라.
친척들이 무대로 나와 상품을 받아가는걸 보니 욕심이 생겼다. 물론 내가 나설 마음은 전혀 없고 맥주 네 병에 알딸딸하게 취한 아빠를 무대 위에 올릴 기회를 호시탐탐 노렸다. 사회자에게 나의 간절한 마음(애타는 똥줄)이 닿았는지 아빠를 지목했고 처음에는 손사례를 쳤지만 화기애애한 분위기상 아빠는 반강제적으로 앞으로 끌려나갔다. 생각해 보니 나는 태어나서 아빠가 노래를 부르는 걸 본 적이 없다. 아주 가아아아아끔 방에서 흥얼거리는 걸 듣긴 했지만 마이크를 잡고 반주에 맞춰 진지하게 노래를 부르는 걸 본 게 이번이 처음일 듯싶다.
사회자의 간단한 멘트 후 아빠는 평소에 좋아했던 나훈아의 고장 난 벽시계를 신청했고
제목 그대로
아빠는,
고장이 나버렸다.
반주 무시, 음정 무시, 사람들 반응 무시.
발라드 창법도 아니고 트로트 창법도 아닌,
아 몰라 몰라 알 게 뭐야 나만 신나면 된 거야 창법.
고흐장앙난 ↗ 벽흐시계눈 멈추었눈데에에에 ↘ ↗ 즈으으ㅁ 세에월은 고자응도오오↗ 엄눼에에에 ♬
(번역: 고장 난 벽시계는 멈추었는데 저 세월은 고장도 없네)
자신의 코창력에 취해버린 김 씨 아저씨.
내가 곧 나훈아고 고장난 벽시계이니라. 물아일체. 두둠칫.
왜 아빠가 이제껏 노래를 안 불렀는지 알 것 같았다. 주변 사람들이 못부르게 한게 아닐까. 음치 박치 몸치였다.
아빠가 민망할까 봐 무대로 따라나간 엄마는 아빠 옆에서 손뼉박수로 박자를 맞춰줬는데 아빠의 줄타기급 아슬아슬한 박자놀음에 엄마의 양손바닥이 길을 잃고 지휘자처럼 허공만 휘저었다. 아빠의 엇박자를 가지고 노는 실력은 완전 나얼급이었다.
제헌절 기념행사보다 더 숙연했던 아빠의 무대.
남의 좋은 잔칫날, 환호소리보다 숨죽여 지켜보던 사람들의 거친 콧소리만 객석을 가득 채웠다.
다 된 밥에 사위 김 씨 뿌리기 성공.
아빠의 무대에 대한 제 점수는요,
아빠, 오늘로써 노래는 끝이올시다.
3시간 같던 3분의 '아빠만 신난 개인콘서트'가 끝나고 아빠는 제비 뽑기 경품으로 양말을 뽑았다.
양말 한짝에 팔려버린 이씨 가문 유일한 딸의 숨겨둔 사생활.
아빠 무대 후, 몇 분 동안 나는 자발적 유배행으로 화장실에 숨어있었다. 일행 아닌 척 이 집 가족 아닌 척.
다음날, 술이 깬 아빠는 전날 본인이 무대를 장악 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장악은 했었지.
경악도 했었고.
그냥 1등 했다고 해줬다.
이게 효도가 아닐까 싶다.
잘 장성한 자식들이 마련해 준 잔치상을 받는 이모할머니의 환한 미소는 여름 햇살만큼이나 눈부셨다. 90년이라는 긴 세월을 걸어온 할머니의 삶은 얼마나 고단했을까. 문득 우리 부모님의 잔치에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참석해 지금처럼 시끌벅적 즐겁게 웃으며 축하해줄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미래의 오빠네 자녀들이 웅성웅성 모여 엄마아빠 앞에서 재롱부릴 때 나는 그때도 지금처럼 예예 곧 60대입니다 예예 여전히 무직입니다 예예 아직도 결혼 못했습니다 라 대답할 생각 하니 마음이 조금은 무겁다.
돈 많이 벌어서 남편과 자녀역을 할 아르바이트를 고용해야겠다.
아빠의 코창력에 건배.
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