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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분주 Apr 05. 2023

부부싸움은 칼로 칼베기

우리 엄마와 아빠는 안 맞아도 너무 안 맞다. 

가끔 보면 어떻게 40년이란 긴 시간을 함께 했는지 의문이 들정도로 자주 다투고 삐지고 말도 안 하다가 또 어느새 한마음 한뜻으로 뉴스에 나오는 정치인을 욕하며 낄낄댄다.


엄마는 젊은 시절, 모든 여성들이 그렇듯이 아빠말에는 그러려니 참고 살아오다가 점점 남성호르몬이 강해지면서 웬만한 일에는 눈도 깜박 안 할 정도로 강력한 초인이 되었다. 그에 비해 아빠는 여성호르몬이 강해지다 보니 작은 일에 쉽게 상처받고 말없이 큰방에 드러누워 속앓이를 하는 날이 잦아졌다.


어느새 아빠를 받들던 엄마에게 아빠는 밉상의 아이콘, 처단의 대상이다. 한 가지 실수를 놓고 봤을 때, 엄마 본인이 잘못하면 봐줄 수 있는 아주 작은 귀여운 실수라면 아빠가 작은 잘못을 하나 하게 된다면 그 순간부터 아빠는 배척하고 비난하고 두 팔 걷고 처단해야 할 왜놈급의 대역죄인이 되었다. 부모님의 일상을 관찰하다가 부부싸움을 하는 날이면 일기를 썼다.






2022년 10월 28일 금요일 분주의 일기

오늘은 엄마가 밥 차리기 귀찮다고 외식하러 나가자고 했다. 무사히, 조용히 먹고 들어올 수 있을까. 엄마가 대문에 걸려있는 마스크 한 개를 쓰윽 쓰더니, 마스크에서 개똥 냄새가 난다고 기겁했다. 물론 내 건 아니다. 난 얼짱 연예인 마스크를 쓰기 때문에 내거는 구분이 쉽게 된다.


냄새가 나면 그냥 버리면 될 것을 굳이 썼다 벗었다를 반복하며 사냥개마냥 코를 킁킁거리고서는 마스크에서 이 정도 냄새가 나는 거 보니 분명 이건 아빠가 쓰던 것이라면서 혀를 끌끌 찼다. 이 정도 구취면 속이 썩어 문들어졌거나 길에서 개똥을 주워 먹은 수준이라면서 아빠를 맹렬히 비난하였다. 북한 아나운서 아줌마가 한국을 비난하는것보다 더 날카로운 수준이었다. 


엄마는 나보고 당장 마스크를 불에 태워라 했다. 그러던 중 미리 나갈 준비를 마친 아빠가 베란다에서 마스크를 쓴 채로 얼굴을 쏙 내밀고는 


"내 마스크는 내가 벌써 쓰고 있는데..." 

말하고 멋쩍게 웃으셨다. 


그렇다면 냄새나는 그 마스크는 엄마 본인 거다. 보통 사람이라면 굉장히 민망해야 할 순간인데 나는 잊고 있었다. 우리 엄마는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심각한 표정으로 마스크에 냄새가 베일정도로 구취가 나는 거 보니 본인 위장에 문제가 있거나 충치가 생긴 것 같으니 내일 당장 병원을 가봐야겠다며 정말 아무렇지 않게 새 마스크를 꺼내 썼다. 호롤로로ㅗ롤. 그리고는 껄껄 웃으면서 먼저 집을 나섰다.

마스크 위로 보이던 아빠의 억울한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 이유 없이 욕먹은 아빠가 짠했다. 짧은 순간이지만 나의 하나뿐인 아빠는 개똥 주워 먹은 사람이 됐다. 오늘 외식도 험난할 것 같다.



2022년 12월 09일 금요일 분주의 일기

아빠가 저녁에 출출하다고 컵라면에 물을 붓고 있었다. 그걸 지켜보던 엄마가 인스턴트는 몸에 안 좋다며, 텔레비전에서 의사가 그렇게 먹지 말라고 하는데도 기어이 그걸 먹고 있냐며 아빠에게 잔소리했다. 나트륨이 몸에 들어가면 독소가 쌓이고 어쩌고 저쩌고. 애써 좋은 재료로 음식 해주면 뭐 하냐 인스턴트로 몸을 망치는데 어쩌고 저쩌고. 흰 가운만 안입었지 엄마는 의사수준으로 아빠를 비난했다.

그냥 아빠 존재가 못마땅한 게 아닐까.

라면이 익기를 기다리는 아빠 뒤통수에 대고 엄마는 계속 잔소리를 했다. 뒤돌아있어서 자세히는 못 봤지만 아마 아빠는 울고 있었을 것 같다. 어쩜 아빠한테는 세상에서 가장 힘든 3분의 기다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찝찝하고 무거운 마음으로 컵라면이 코로 넘어가는지 입으로 넘어가는지도 모르게 아빠는 라면을 흡입했다. 라면 한 젓가락에 엄마 잔소리 한번. 나 같으면 치사하고 더러워서 안 먹었을 텐데 또 신기하게 아빠는 엄마가 그러거나 말거나 후루룹 짭짭 잘 드셨다. 둘이 천년연분인가.



2022년 12월 12일 월요일 분주의 일기

오늘은 비가 올 것처럼 날씨가 꾸물꾸물했다. 기온도 낮아지고 쌀쌀한 날이었다.

엄마는 비 오는 날에는 따끈한 국물이 생각난다며 라면을 끓였다. 아빠가 이때다 싶어 큰방에서 호다다닥 뛰어나와서는 엄마에게 왜 라면을 먹냐며 인스턴트가 몸에 안 좋은 거 아니냐면서 오랜만에 건수 잡아서 신난 톤으로 손흥민 수준의 혀재간으로 엄마를 코너로 몰기 시작했다.


하지만 엄마는 컵라면은 용기가 스티로폼이라서 "더"안 좋은 거고, 끓여 먹는 라면은 뜨거운 물에 면을 팔팔 끓여 세균이 다 죽어서 괜찮다 했다 (... 응?) 그리고 사람이 너무 좋은 것만 먹어도 안된다며 라면에 총각무까지 얹어서 야무지게 드셨다. 

아빠 완패. 

라면 먹는 엄마입만 고요히 쳐다보던 분에 겨운 아빠의 떨리는 두 주먹을 잊지 못한다.

오늘 아빠의 심정을 대변하시오.



2023년 1월 25일 화요일 분주의 일기

우리 가족은 항상 아침식사 후에 믹스커피를 한잔씩 마신다. 아빠는 보통 노란색 커피믹스(한 봉지에 100원 정도)를 마시고 엄마는 조금 고오급진 카누 스페셜 라떼커피(한 봉지에 900원 정도)를 마신다. 매번 커피를 마실 때마다 역시 비싼 게 향이 다르다면서 깊은 맛과 풍부한 크레마 그리고 무엇보다 이탈리아에서 마시는 것 같은 본토의 맛이난다며(...참고로 엄마는 이탈리아에 가본적 없음) 엄마가 마시는 고오오급 커피를 극찬했다. 그리고는 아빠는 커피의 '커'자도 모른다면서 아빠한테 흙탕물에 설탕을 타줘도 맛있다고 호로록 마실사람이라며 가만히 있던 아빠를 맹비난하기 시작했다. 아빠는 뜬금없이 오늘도 엄마 혀에 귀싸다구를 맞았다.


오늘은 내가 호기심이 생겨 둘 다 같은 아빠의 노란 믹스커피를 타줬다. 그리고는 엄마의 반응을 기다렸다. 엄마가 커피를 반 정도 마실 때까지 기다렸는데 아무 반응이 없자 내가 먼저 오늘 커피 맛이 좀 다르지 않냐고 넌지시 물었다. 그러자 엄마는 기다렸다는 듯이 미세하게 커피의 맛이 달라진걸 진즉부터 알아차렸다면서,


"오늘 커피맛이 좀 다르긴 하네.. 우리 딸이 타줘서 더 맛있네~♡ 호호호"


아빠 싸구려 커피맛이랑은 차원이 다르다면서 역시 비싼 게 최고라고 엄지척을 했다. 

난 참 우리 엄마를 알 수 없다. 

이 사실을 아빠에게 알려 며칠간 우롱차처럼 우려먹도록 엄마 놀리는 소스를 제공할 것인가 말 것인가 고민했지만 난 엄마 편이라 그냥 입다물었다.


미안해요 아빠.



그래맛있는 거 앞에 하나 되는 우리 엄마아빠의 대화.

뚱뚱이들은 먹을 거 앞에선 단합이 잘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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