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분주 Mar 16. 2023

나의 연진이에게

나에게는 3살 터울의 오빠가 있다.

부모님께는 오빠가 첫 번째 자식이다 보니 매일 품에 안고 오냐오냐 키웠고 버릇없이 하고 싶은 거 하고, 사고 싶은 거 다 사야 되는 밉상 금쪽이가 되었다. 오빠가 없는 나의 친구들은 오빠에 대해 로망이 있었는데 어릴 적 나에게는 오빠란 존재는 그저 짜증 나는 존재, 복수하고 싶은 존재, 쥐어패 버리고 싶은 존재였을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오빠는 항상 어린 나를 괴롭혔다. 나보다 힘이 세다는 이유로 맨날 머리를 쥐어박거나 잔심부름을 시키거나 발로 까버렸다. 그리고 매번 울리고 달래주고 울리고 달래주고. 아 생각할수록 열받네. 항상 내 마음속으로는 언젠가는 이 수모를 다 갚아주리라 다짐했다. 복수를 하리라. 받은 거 열 배 백배로 되갚아주리라.


하지만 나도 일방적으로 당하는 착한 성격은 아니라 오빠랑 치고받고 싸우고 깨지며 뿌리 깊은 잡초처럼 자라서 누구와의 몸싸움에도 지지 않게 되었고 하도 많이 맞아서 맷집도 단단해졌다. 덕분에 웬만한 일에는 눈물도 안 나고 간도 크다. 그 어떤 협박에도 쫄지 않도록 오랜 기간 셀프 이미지 트레이닝을 해온 결과 지금껏 튼튼한 멘탈로 이 험난한 세상을 잘 살아가고 있다. 이 부분은 오빠에게 감사할 따름. 



오빠는 친구들을 자주 집에 초대해 놀곤 했는데 그때마다 나에게 멀리 오래 집에서 나가 있어 달라 정중하게 협박했다. 내가 쪽팔린다는 이유였다. 혹여나 친구가 갑자기 집에 놀러 오는 날에는 나에게 방 안에서 나오지 말고 없는 척하라는 지시를 내린 적도 있었다. 물론 나중에 발로 까일걸 알면서도 방문에 귀대고 있다가 오빠 친구들 얼굴이 보고 싶어서 쓰윽 밖으로 나가 수줍게 인사하고 친구들 얼굴 스캔 한번 뙇하고 온갖 콧소리를 내며 나의 존재를 제대로 인식시켜주곤 했다. 아 물론 친구들이 간 다음 주먹으로 처 맞긴 했지만.   


몇몇 잘생긴 오빠 친구들과 친해지고 싶은 중2병 마음에 오빠 핸드폰에서 몰래 잘생긴 친구 번호를 강탈해서 실수인 척 문자를 보내고 '이것도 운명인데' 드립 치다가 오빠한테 걸려서 월드콘으로 처 맞은 적도 있다. 아이스크림이 거의 녹은 상태라서 아프지는 않았다 헤헷. 오빠는 개망신이라며 드러눕는 꼴이 어찌나 고소하던지.

저 동생년 때문에 친구를 줄줄이 잃었어.

또 어떤 오빠 친구한테 사랑고백을 해서 떨어져 나가게 해 줄까나 룰루.


오빠가 가장 짜증 날 때는 뭔가 같이 먹을 때였다. 엄마가 과자를 사 오면 항상 공평하게 나눠 가져야 된다며 과자를 들고 와서는 너 하나 나 하나 너 하나 나 두 개 너 하나 나 세 개. 뭔가 공개적으로 공평하게 나누는 거 같은데 아닌 것 같은 찝찝한 기분. 결국 내가 3개 가질 때 오빠는 7개를 가졌다. 그래놓고 공평하게 세는 거 안 봤냐고 또 발로 깠다. 오빠 오른발 킥의 강도를 봤을 때 적어도 대한민국 대표 축구선수가 될 재목이라 믿었다. 하지만 오빠는 어린 시절 내 마음 분노의 불씨를 키운 것과는 반대로 불을 끄는 소방관이 되었다. 인생 참 알 수 없다.




항상 싸웠던 우리는 유일하게 아빠 앞에서는 사이좋은 오누이관계가 되었는데 그 이유는 우리 아빠의 충격요법 때문이다. 형제가 많았던 가족의 막내아들이었던 아빠도 형들에게 갈취와 협박을 당한 서러움이 있는지 나이가 적든 많든 무조건 형제자매남매는 공평하게 똑같이 나눠야 된다는 철학을 가진 사람이다. 그래서 하나를 두고 오빠와 내가 싸우면 무조건 반반씩 나눠주곤 했다. 그게 무엇이든.


엄마가 축구공인지 배구공인지 공하나를 사들고 왔는데 우리 남매는 서로 갖고 싶어서 또 크게 싸웠다. 엄마한테 전해 들은 아빠가 우리 둘을 집합하여 거실에 앉히고는 보는 앞에서 가위로 공을 반으로,


싹둑. 


이등분된 공은 기능을 상실한 쓰레기가 되었고 아빠는 사이좋게 양보하며 놀지 않으면 결국 둘 다 갖지 못한다는 교훈을 직접 두 눈으로 확인시켜 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당시 어린 우리가 아빠의 큰 뜻을 이해할리가. 우리는 그저 충격을 받았을 뿐이다.

양보고 나발이고 그건 모르겠고 

토막난게 무서워요 아부지.


며칠 뒤, 엄마 친구로부터 고오오급 바비인형을 선물 받았다. 오빠 본인은 아무것도 선물받지 못한것에 심술이 나서 내 바비인형을 가지고 놀겠다고... (응?) 우리는 또 인형을 가지고 치고 받고 혈투를 펼쳤다. 퇴근하고 온 아빠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우리 앞에서 일장연설을 하고는 최고오오오급 바비인형을 정확하게 반으로 잘라서 오빠에게 상체를, 나에게는 하체를 주었다. 이 정도면 아동정서학대와 트라우마 콤비네이션이 아닐까.


그렇게 아빠의 충격요법을 잊어갈 때쯤, 아랫집에서 며칠 여행을 간다고 강아지를 우리 집에 맡겼다. 오빠와 나는 서로 강아지를 안고 자겠다고 또 싸웠다. 아빠가 싸우는 우리를 보고는 강아지를 데리고 다시 거실로 집합시켰는데 오빠와 나의 머릿속에는 절단난 바비인형이 생각나서,

아이고 형님 먼저 강아지 안으세요.

아니여 동상. 동상이 먼저.

누이좋고 매부좋고 도랑치고 가재잡고 친한적하고 강아지 목숨 살리고.


갑자기 세상 둘도 없는 절친이 되어 아우먼저 형님먼저 강아지를 안아보라고 전레없는 친절을 베풀었다. 그 모습을 보던 아빠도 세상 뿌듯한 표정으로 이봐라 이 얼마나 보기 좋으냐 하며 미소 지었다. 

고.. 고마워요 아빠. 우리 남매는 아직도 그 충격요법을 잊지 못한 어른이 되었어요.




오빠와 나의 싸움이 멈춘 시기는 내가 대학생이 되면서 집을 떠난 시점이다. 처음 집을 나와 살게 되면서 무섭고 두려운 순간들이 많았는데 그럴 때마다 전화로 오빠는 용기도 주고 생활 꿀팁도 주고 용돈도 주고 어느새 믿고 의지할 대상이 되었다. 


물론 오빠는 하루아침에 좋은 사람이 되지 않았다. 오빠가 군대에 있는 동안 나에게 대학 친구들과 찍은 사진을 보내달라 해서 스티커 사진을 보내줬는데 그중 제일 예쁜 내 친구 J를 본인 동생이라 속여 군대 생활을 조금 편하게 했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낄낄대며 하는 와중에 내 외모를 지적하는 꼬락서니를 보니 다시 어릴 때 분노가 스멀스멀 치밀어올라 사람인성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오빠와 친해지고 서로 사소한 이야기를 하며 하나뿐인 내 핏줄이라며 잘 지내고는 있었지만 나의 어둡고 깊은 마음속에서는 언젠가 오빠에게 복수를 하리라 다짐하고 있었는데 드디어 그 시간이 오고 말았다.

복수라니. 

내가 송혜교가 되리라. 망나니 칼춤을 추리라.

난 매 맞았지만 명량한 년이거든여.



복수할 대상은 바로. 겨울에 태어날 오빠의 첫째 아기. 나의 첫 번째 조카. 우리 부모님의 첫 손주.

이 세상 가장 뜨거운 사랑과 관심으로 복수하고 말겠어.

고모를 세상에서 가장 좋은 사람으로 생각하게 만들어 오빠를 소외시켜야겠다.

완벽한 복수다.


푼돈으로 내가 하늘이 되겠어.




* 혹시나 오해할까 봐 알려드립니다.

미리 괴롭힘 허락받았습니다.







                    

이전 04화 친절도 병이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