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곰꿈
“어서 가거라.”
세눈녀의 독촉에 산이는 한 차례 더 한숨을 내쉬고는 터벅터벅 숲으로 들어갔다. 쌓인 낙엽이 산이의 발밑에서 와삭댔다. 날이 추운데도 어리의 숲에는 날방너리(나비의 모습을 한 정령) 몇이 금빛 날개를 팔랑대며 날아왔다. 곰꿈을 꾸기 위해 동굴잠에 들어가는 자는 침묵해야 한다고 했으니 산이는 날방너리를 보고도 억지로 못 본 척 앞만 보고 걸었다. 날방너리들은 괘념치 않고 금빛 날개를 팔랑대며 오르락내리락, 앞서거니 뒤서거니 춤을 추었다. 날방너리 춤이 신명을 일으켜 나무 정령, 나암너리들이 가지를 흔들며 휘파람을 불었다. 하늘에서는 신조가 뒤를 따랐다. 산이는 애써 모두를 외면하고 조용히 가림막이 쳐져 있는 곰굴로 들어갔다.
추웠다.
어두웠다.
배가 고팠다.
상관없었다. 어둠도 추위도 배고픔도 산이에겐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목이 마르면 가죽주머니에 든 물을 한 모금 마셨고 배가 고프면 산마늘을 씹었다. 문제는 곰꿈이 꾸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곰꿈은커녕 꿈이란 거 자체가 꾸어지지 않았다. 가부좌한 채 꼬박꼬박 졸 때도, 기력을 잃어가는 몸을 바위에 의지해 깊은 잠에 들 때도 곰꿈은 당최 꾸어지지 않았다. 어둔 동굴 안에서 곰꿈을 기다리는 시간은 지루하기만 했다.
동굴 밖에서는 무심한 달이 지고 해가 뜨고, 또다시 달이 뜨고 해가 졌다. 산마늘도 물도 다 떨어졌다. 가늠할 수 없는 시간만이 동굴 안을 채우고 있었다. 산이는 차츰 동굴 바닥에서 웅크리고 누워 지내는 시간이 늘어났다. 어떤 날은 종일 잠에 빠져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긴 시간이 흘렀을까? 짧은 시간이 흘렀을까? 시간을 가늠할 수 없는 어둠 속에서 산이는 잠결인 듯 꿈결인 듯 빛 한줄기를 보았다. 빛줄기는 점점 굵어지고 밝아지더니 파도처럼 일렁였다. 일렁임 속에서 둥근 빛방울들이 하나 둘 퐁글퐁글 솟아나더니 춤을 추기 시작했다. 빛의 어리들이다.
빛의 어리들은 저들끼리 모였다 흩어지기를 반복하며 허공에서 춤을 추었다. 춤을 추며 별을 그리고 달을 그리고 해를 그렸다. 그러다간 핑그르르 소용돌이치다가 점멸되다가 다시 소용돌이치다 물처럼 흐르다가 물고기를 그리고 꽃을 그리고 나무를 그리고 새를 그리고 사슴을 그리고 곰을 그렸다. 산이는 현기증이 났다. 빛의 어리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산이 손을 잡아끌며 더불어 춤을 추자 하였다. 오랜 굶주림으로 비쩍 마른 산이가 휘청대며 일어섰다. 빛의 어리들이 소리 없이 웃었다. 산이도 따라 웃었다.
산이는 어리들과 원무를 돌고, 해, 달, 별을 그리고 새와 물고기, 나무, 곰 사슴, 늑대, 호랑이를 그렸다. 아는 모든 것을 그렸다. 현기증도 잊은 채 깔깔깔 웃으며 몸으로 춤으로 그림을 그렸다.
갑자기 동굴 입구에서 밝은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놀란 빛의 어리들이 산산이 흩어졌다. 산이는 눈이 부셔 얼굴을 찡그렸다.
곰이다!
빛 속에 큰곰 하나가 서 있었다. 산이는 멍하니 큰곰을 바라보았다. 곰꿈을 꾸고 있는가? 곰이 허공을 걸어 산이에게 다가왔다. 쿵, 쿵, 쿵. 한 걸음 한 걸음 산이에게 다가왔다. 낯익은 얼굴, 고디였다.
“내가 꾸는 꿈, 내 영혼, 고디.”
피시시 웃음이 났다.
“어, 넌 누구야?”
혼자가 아니었다. 거대한 큰곰 고디 뒤를 따라 낯선 자가 빛 속을 걸어왔다. 사람이 아니었다. 이마 양 옆으로 빛나는 뿔이 돋아 있었다. 뿔을 향해 치켜 올라간 두 눈은 크고 검었다. 낯선 자가 빠른 속도로 걸어왔다.
“사람도 곰도 아닌 자. 너는 누구야?”
낯선 자가 손에 든 긴 것을 번쩍 쳐들었다. 기다란 그것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산은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