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좋은 사람 나쁜 사람
산이와 세눈녀는 아시더기 아래 가장 큰 막집으로 들어갔다. 검고가 두 아들 검은귀, 검은돌와 미리 세워 놓은 거처다.
검고와 두 아들이 입구에 서서 세눈녀를 맞았다.
“고맙네, 검고.”
“고맙다니요. 당연히 저희가 해야지요. 건강은 어떠신가요?”
“걱정해 줘서 고맙네. 이번 봄제의는 거뜬하다네.”
세눈녀가 검은귀와 검은돌을 돌아보며 말했다.
“산이에게도 막집 짓는 법을 가르쳐 주려므나.”
“네?”
검은귀와 검은돌은 놀라 눈이 동그래졌다.
산이는 여느 사람들과 다르다. 사람의 일을 할 줄 모른다. 부족민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막집 짓는 걸 가르쳐 주라니. 그것도 사람들이 산이에게 뭘 가르치려고 들면 굳이 애쓰지 말라며 말리던 분이. 검은귀와 검은돌은 자신들이 세눈녀 말을 제대로 들은 것인지 의심스러웠다. 검은귀와 검은돌이 어리둥절해하는 사이, 당사자 산이는 들고 있던 짐을 내려놓고 밖으로 나갔다.
“어, 어디 가?”
검은돌이 산이를 불렀지만 산이는 뚜벅뚜벅 걸어 나여루가 막집 세우는 데로 갔다. 나여루는 산이보다 세 살 많은 여성 사냥바치다. 곰족 중에 손에 꼽힐 정도로 뛰어난 사냥꾼인데 특히 창을 잘 던진다. 남성 사냥바치에 비해 체구가 작아 스스로 자기 몸에 맞는 짧은 창을 만들어 쓴다. 나여루의 짧은 창은 퍽 멀리 날아가기도 하지만 적중률이 백발백중에 가깝다. 산이는 수년 전부터 나여루가 기다란 머리카락을 정수리 위로 올려 묶고는 홀로 숲을 달리며 창 던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다른 사람에 비해 체구가 작고 힘이 없으니 홀로 사냥 연습을 하는 것이었다. 이젠 어엿한 사냥바치다.
산이가 다가오는 걸 본 나여루가 손을 번쩍 들더니 소리쳤다.
“산아! 저기 가서 끈 하나만 가져올래?”
바닥에 가지런히 눕혀져 있는 기다란 나무 기둥들 곁에 둘둘 말린 마삭줄 뭉치가 몇 개 놓여 있었다. 산이는 그중 하나를 집어 나여루에게 가져다주었다.
“고마워. 산아, 이왕이면 여기도 좀 잡아 줘.”
“잡아? 어디?”
“여기! 내가 잡고 있는 데 말이야.”
나여루 눈짓에 산이가 땅에 박아 놓은 나무말뚝 곁에 기다란 작대기를 붙여 잡았다. 작대기는 막집 지붕을 떠받쳐 주는 작대기다. 나여루는 능숙한 솜씨로 둘을 엇갈려 묶어 고정시켰다.
“산이도 이런 거 할 줄 알아야 해.”
“이런 거? 묶는 거?”
“묶는 거뿐만 아니라 막집 짓는 거, 모두 다.”
“왜?”
“왜?
“응. 왜?”
나여루가 하던 일을 멈추고 멍하니 산이를 바라보았다. 당연한 걸 왜라고 물으니 할 말이 없었다.
“산이는 할 줄 몰라도 괜찮아. 내가 해 주면 되거든.”
어느 틈에 검은돌이 다가와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나여루가 짐짓 화난 얼굴로 검은돌을 꾸짖었다.
“검은돌, 그런 생각은 위험해. 뭐든 다 해 주면 산이는 사람으로 살 수 없어. 스스로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필요한 거야.”
“내 말은 그게 아니고….”
검은돌이 머쓱해하자 형 검은귀가 빙긋 웃더니 소리쳐 불렀다.
“검은돌! 지금은 이 형을 도와주는 게 어때?”
“갈게, 형.”
얼굴이 붉어진 검은돌이 후다닥 검은귀에게 뛰어갔다. 산이 눈길이 검은돌을 따라갔다.
“검은돌은 좋은 사람이야.”
나여루가 웃으며 대답했다.
“산이가 사람 볼 줄 아네. 맞아. 검은돌은 좋은 사람이야. 하지만 산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나쁜 사람이 될 수도 있어.”
“내가 검은돌을 나쁜 사람 되게 해? 왜?”
산이가 놀라 나여루를 바라보았다.
“검은돌이 뭘 해 줄 때 산이 구경만 하면 검은돌은 나쁜 사람이 돼. 하지만 검은돌이 하는 걸 잘 지켜보고 배우면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어. 무슨 말인지 알아? 자기가 아는 거, 할 줄 아는 거, 그런 걸 남에게 나눠 주고 가르쳐 주는 게 좋은 거라는 뜻이야. 그만 말하고 저기 가서 작대기 하나 더 가져다줘.”
산이는 나여루가 시키는 대로 작대기를 하나 더 가져왔다. 나여루는 말없이 작대기를 받아 마삭줄로 묶었다. 산이는 일하는 나여루의 손을 바라보며 나여루가 한 말에 대해 생각했다.
‘뭐든 다 해 주면 산이는 사람으로 살 수 없어.’
산이는 나여루의 말이 무얼 뜻하는지 안다. 산이는 지금 사람답게 살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부족민들이 가르치고 도와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산이는 왜 그래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신조는 산이를 ‘사람곰’이라고 부른다. 날방어리, 나암너리들은 ‘곰이곰이’라고 부른다. 어리의 숲 식구들이 곰이라고 부르니 당연히 산이는 자신이 고디와 같은 곰이라고 믿었다. 생긴 모습은 다르지만 같은 곰엄마에게서 자란 남매곰. 하지만 세눈녀를 만난 후로 자신이 고디와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이를테면 고디는 산이와 나란히 앉아 사람 말을 배워도 사람 말을 하지 못하고, 산은 활을 배워 하늘을 나는 새를 사냥하게 되었지만 고디는 하던 대로 강물에서 맨손으로 헤엄치는 물고기를 사냥했다. 산이는 그릇에 담은 음식을 숟가락이나 젓가락으로 먹었지만 고디는 땅이나 돌 위에 놓고 그냥 입으로 먹었다. 산이는 사람이 하는 일은 그게 뭐든 금방 따라했지만 고디는 그러질 못했다. 그런 사실을 깨달을 때마다 산이는 더 이상 사람의 행동을 배우고 싶지 않았다.
하루는 세눈녀가 물었다.
“산아. 왜 더 배우지 않니?”
“고디는 못해. 나도 못하고 싶어.”
세눈녀가 안쓰러운 듯 산이를 바라보았다.
“고디는 왜 못해?”
세눈녀가 두 손으로 산이의 손을 꼭 잡고, 두 눈으로 산이의 눈을 마주보며 작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고디는 곰이고, 산이는 사람이라서 그렇단다.”
산이는 깜짝 놀랐다.
‘나는 곰이 아니라고? 세눈녀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화를 내거나 뛰쳐나가지는 않았다. 수 차례 스스로 질문하고 스스로 대답했던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대신 눈물을 흘렸다. 세눈녀는 조심스레 말했다.
“하지만 산이는 곰이기도 하단다. 사람이면서 곰인 거지.”
“사람곰?”
“그래. 사람곰.”
신조처럼 말했다. 사람 세눈녀가 어리의 숲 신조처럼 말했다. 산이는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하지만 곁들이들은 산이더러 사람이라고 했다. 사람이니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고 했다. 밤이 되면 굴로 가지 말고 사람의 집에서 자야 한다고 했다. 그럴 때마다 세눈녀는 웃으며 말했다. “때가 되면 그리하겠지.” 세눈녀는 산이가 숲으로 가는 것을 막지 않았다.
세눈녀의 보살핌을 받은 지 10년째다. 숲을 나온 것은 5년. 하지만 산이는 여전히 밤이면 고디와 함께 어리의 숲에 있는 굴로 돌아갔다. 여름에는 고디와 함께 들판이나 나무 위에서 잤다. 산이가 막집 짓는 걸 배워야 할 까닭이 없었다. 그런데 나여루가 막집 짓는 걸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세눈녀도 검은돌 형제에게 막집 짓는 걸 가르치라고 했다. 물끄러미 나여루 일하는 손을 지켜보던 산이가 화제를 바꿨다.
“검은귀는 자꾸 나여루를 봐.”
묶은 작대기를 일으켜 세우다 말고 나여루가 우뚝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