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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정자 Apr 08. 2023

신곰, 산이

9. 아스라의 봄

 

북풍은 산맥 너머로 돌아가고, 꽁꽁 언 강이 풀리고, 자작나무 가지에 새잎이 돋았다. 어미곰들은 겨우내 굴에서 지낸 아기곰들을 데리고 동굴을 나왔다. 새로운 시간이 시작되고 있었다. 

고디 등에 얹혀져 곰굴에서 나온 산이 역시 빠르게 몸을 회복해 갔다. 

처음에 사람들은 산이가 죽은 줄 알았다. 세눈녀 거처에서 둥글게 둘러앉아 다가오는 봄제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산이를 등에 얹은 고디가 들어왔다. 뼈와 살가죽만 남은 산이는 창백했고, 의식이 없었다. 세눈녀가 급히 산이를 안았다. 그 순간 세눈녀는 보았다. 산이가 곰굴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세눈녀가 저도 모르게 멈칫하자 사람들도 뒤따라 산이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걸 깨달았다.  

“곰꾼을 꾼 것입니까?”

둘러선 사람들의 호기심은 성급했다. 세눈녀를 화가 치밀었지만 호기심 또한 정당함을 인정했다.

“곰꿈이네.”

세눈녀는 간단히 대답하고 산이를 침대에 눕혔다. 세눈녀는 산이의 코 밑에 손가락을 댔다. 미세했지만 숨결이 느껴졌다. 맥을 짚었다. 약하지만 맥 또한 뛰고 있었다. 

“모두들 물러가게. 고둔달, 자네는 가서 물을 좀 떠오시게.”

세눈녀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무거웠다. 사람들이 하나 둘 밖으로 나갔다. 고둔달도 물병을 들고 서둘러 우물로 달려갔다.  

산이는 며칠 만에 깨어났다. 깨어나자마자 산이는 말했다.

“뿔난 자가 빛의 길을 따라 내게 왔어.”     

산이는 곰처럼 회복이 빨랐다. 봄제의가 시작될 즈음엔 삐쩍 마른 몸에 다시 살이 올랐고, 눈동자는 초롱해졌으며, 아침이면 곰 고디를 타고 들판을 달렸고, 고디보다 빠르게 나무를 탔다. 활기를 주체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한시도 가만히 앉아 있지 않았다. 시키지 않았는데 사냥을 했다. 멧돼지를 잡은 날은 고디 어깨에 줄을 매 질질 끌고 오기도 했다. 세눈녀는 그런 산이가 불안했다. 움직임은 곱절로 늘었는데 말수는 눈에 띄게 줄었기 때문이었다. 산이를 통해 세눈녀 역시 뿔난 자를 보았다. 가면을 쓴 사람이라는 것은 눈치챌 수 있었다. 그러나 누구인지 왜 산이의 곰꿈에 등장한 건지 세눈녀는 알 수 없었다. 세눈녀는 자신들이 볼 수 없는 어떤 곳에서 무슨 일인가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만 감지할 뿐이었다. 

달이 둥글어지기 시작한 날 아침, 산이는 평소와 다름없이 들판을 가로질러 먼 곳까지 달려갔다가 세눈녀에게 돌아왔다. 세눈녀가 마지막 보따리를 수레에 싣고 있을 때였다. 곁들이(자기 영역으로 돌아가지 않고 단그리 곁에서 일을 나눠하는 사람) 하야니는 기다란 줄로 수레 위를 가로세로 둘러 묶고 있었다. 아시더기까지 가는 길은 그리 멀지 않지만 도중에 보따리들이 떨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숨이 턱까지 찼구나.”

세눈녀가 산이 손을 잡으며 맞아 주었다. 

“한단그리께서는 날마다 보면서도 산이가 그렇게 반갑고 좋으세요?”

곁들이 하야니가 줄 묶던 손을 양 허리에 얹고는 놀리듯 말했다.

“우리 산이는 언제 봐도 반갑지.”

세눈녀가 웃으며 대꾸했다.

“아시더기 가?”

산이가 세눈녀에게 물었다.

“그래. 산아, 너도 가자꾸나.”

“나?”

“그래. 이번 봄제의부터는 너도 참석하면 좋겠구나.”

산이 잠시 자신의 눈을 세눈녀 눈과 맞추었다. 판단의 근거를 찾지 못할 때면 하는 행동이다. 그럴 때마다 세눈녀는 속 깊숙한 곳에 숨겨둔 것까지 산이가 보는 것 같아 긴장이 되곤 했다. 하지만 이건 산이만의 판단 방식이라는 걸 알기에 세눈녀는 산이의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잠시 후 산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산이가 세눈녀와 이야기를 하는 동안 고디는 수레로 다가가 코를 킁킁거렸다.

“안 돼.”

하야니가 짝, 손뼉을 쳐 경고를 했다. 고디가 놀랐는지 하야니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이내 다시 킁킁거렸다. 하야니가 좀 더 큰 소리 나게 손뼉을 짝짝 연거푸 쳤다. 고디가 샐쭉해져서 들판으로 겅중겅중 뛰어갔다. 그 모습을 본 산이가 볼웃음을 지었다.

산이는 세눈녀와 곁들이 하야니, 곰족 최고 사냥바치 고둔달과 함께 어리의 숲 앞에 있는 야트막한 언덕, 아시더기로 갔다. 곧 범족과 마록족, 매족의 사람들도 도착할 것이다. 

아시더기 언덕 위에는 돌과 흙을 3단으로 쌓아 만든 둥근 신단이 있고, 언덕 아래는 너른 들판이 있다. 아시의 네 부족은 해마다 두 번 이곳에 모여 신들께 감사제의를 올린다. 태양이 따뜻해지는 봄에 한 번, 태양이 차가워지는 가을에 한 번. 하늘과 숲과 대지, 그리고 강에 깃들인 아스라의 신들께 정성껏 제물을 만들어 바치고, 신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다. 

감사제가 끝나면 언덕 아래 벌판에서는 흥 마당이 펼쳐진다. 여기저기 모닥불이 피어오르고 누구는 노래를 하고 누구는 춤을 추고 누구는 이야기를 할 것이다. 한껏 치장을 한 젊은이들은 혹시나 마음에 드는 상대를 만나지 않을까 기대에 부풀어 여기저기 기웃거릴 것이다. 그러다 밤이 오면 달놀이를 하며 낮 동안 마음에 둔 사람을 찾아가 준비해 온 머리끈을 건네주고 또 받을 것이다. 

산이는 봄축제가 시작되면 고디와 나무에 올라가 사람들이 왁자지껄 이야기하고 노래하고 춤추는 걸 지켜보았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게 싫어서는 아니었다. 즐길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다. 축제는 사람들의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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