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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쪼자까 Feb 18. 2023

행복해질 운명을 남에게 쥐어주지 말자

 당신은 운명(運命)을 믿는가? 운명이란 초인간적인 힘에 의해 처지나 목숨이 정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운명이라는 말은 영화나 만화에서도 자주 쓰이는 클리셰다.


"당신을 만나는 게 나의 운명이었소."라든지

"당신은 왕이 될 운명입니다."라든지

"우리는 운명의 붉은 실로 이어져 있어."라든지


 영화 속 세상에서 운명이란 말은 등장인물에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사명감을 줄 때 사용된다. 현실에서는 어떨까?


 간혹 주변에서 낙관적 운명론자를 만날 수 있다. 그들은 모든 건 운명이 정해져 있고 그 운명대로 살아가는 것이며, 그 운명을 뒤틀려고 하는 행위 또한 이미 만들어진 운명이라고 믿는다. 이들 중 일부는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며 막연한 희망을 품는 자들도 있다. 하지만 현실감 없는 희망은 말 그대로 희망고문에 불과하다.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 장교 스톡데일은 8년간 동료와 포로로 잡혀 수용소에 갇혀 있었어야 했다. 포로수용소에는 많은 동료 군인들이 있었는데 대부분 오랜 수용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죽었다. 스톡데일의 증언에 따르면 이들 중 가장 먼저 죽은 건 탈출에 대한 막연한 희망에 기댔던 '낙관론자'였다고 한다.

 그들은 부활절에는 풀려날 거라고 믿다가 부활절이 지나면 추수감사절에는,

추수감사절이 지나면 크리스마스가 지나면 풀려날 거라고 믿고,

또 크리스마스가 지나면 부활절에는 풀려날 거라고 믿다가,

다시 맞이하는 부활절 때 반복되는 상심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스톡데일은 살아남아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는 이 속에서 쉽게 나갈 수 없는 현실을 직시하고 반드시 살아서 돌아가겠다며 의지를 다졌다. 부하들의 고립감을 줄이기 위해 자기들끼리 소통할 수 있는 내부 통신 체계를 만들기도 했고 장기간 버텨야 한다는 각오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상황에서는 적극적으로 문제해결 자세를 취하고,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융통성 있는 태도로 현실을 받아들이는 이것을 추후 '스톡데일 패러독스(Stockdale Paradox)'라 불린다. 스톡데일 패러독스는 코로나 확산 장기화로 무기력함이 만연한 요즘 시대에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막연한 운명이나 희망에 자신의 미래를 맡기지 않는다는 스톡데일 패러독스는 우리에게 독립적 사고방식의 중요성을 일깨운다. 우리는 모두 행복한 삶을 목적지로 향하는 버스에 타고 있다. 이런 중요한 버스의 운전대를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잡게 할 순 없지 않은가. 여기 타인의 말만 듣는 인생의 말로가 어떤지 알려주는 이야기가 있다.


 한 농부가 아들과 함께 당나귀를 끌고 시장으로 물건을 팔러 가고 있었다. 햇볕이 내리쪼이는 더운 날이라 둘은 땀을 뻘뻘 흘렸다. 이를 본 마을 사람이 비웃으며 말했다.

"쯧쯧. 바보 같기는. 당나귀가 있으면서 타지도 않고 힘들게 끌고 가고 있잖아?"

농부는 당장 아들을 당나귀에 태우고 자신은 그 뒤를 따랐다.

잠시 후 그들은 노인들이 모여있는 곳은 지나게 되었다. 한 노인이 호통을 쳤다.

"아버지는 걷게 하고 자기는 편하게 당나귀를 타고 가다니. 요즘 어린것들은 부모를 공경할 줄을 모른다니까!"

농부와 아들은 얼른 자리를 바꿨다. 또 그렇게 한참을 가는데 이번엔 젊은 아낙네들이 두 사람을 보며 말했다.

"이렇게 더운 날 어린 아들은 걷게 하고 자기만 편하게 당나귀를 타고 가다니. 저런 사람이 아비라고 할 수 있나, 원!"

농부는 얼른 아들을 자신의 뒤에 태웠다. 시장에 거의 도착할 무렵 그 모습을 본 청년이 말했다.

"저 불쌍한 당나귀 좀 봐. 두 사람이나 타고 가고 있잖아! 자기네들이 직접 길렀을 텐데 어쩜 저렇게 막 대할까?"

농부와 아들은 이 말을 듣자마자 당나귀에서 내려왔다. 결국 둘은 당나귀의 네 다리를 밧줄로 묶은 다음 막대에 건 뒤 앞뒤로 서서 당나귀를 떠메고 갔다.

숨을 헉헉대면서 간신히 도착한 농부 부자의 모습에 사람들은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당나귀를 타지도 않고 저리 떠메고 가다니! 정말 바보 같은 사람들이네. 하하하!"

그때 당나귀가 버둥거리는 바람에 두 사람은 당나귀를 놓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다가 결국 강물에 빠져 물살에 떠내려가고 말았다.




 어떤 인생을 살 것인지는 오롯이 내가 결정할 문제이다. 운명이나 타인의 의견에 행복하게 살 권리를 맡길 필요가 없다. 철학자 칸트는 '모든 사람은 자신의 주인'임을 강조했다. 내 인생의 주인은 나로 있어야 하며 타인에게 주도권을 쥐여준 삶은 절대 행복할 수 없다. 우리가 운명에 따라야 하는 것은 오직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다한뒤에 결과를 기다릴 때뿐이다.


 진인사 대천명(盡人事 待天命).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자신의 일을 성실히 하지 않고 요행을 바라는 사람에게 행복은 주어지지 않는다. 인생의 운명을 내가 쥐었을 때 만이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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