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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쪼자까 Jan 15. 2023

애정(愛情) : 사랑하는 나의 치매할머니

나의 대학생 이야기 (3)

 복학생 시절, 나는 교내 기숙사에 불합격하여 혼자 사시는 친할머니집에서 1년간 기숙생활을 한 적이 있다. 통학이 버스로 1시간 20분 거리라 불편했거니와 통근시간도 엄격하셔서 저녁 6시까지는 집까지 도착해서 같이 식사하기를 고집하셨다.

 당시 취업준비에 바빠 여러 가지 대외활동을 준비하고 있었기에 집에 늦게 들어가는 경우가 많았고, 늦는다고 미리 연락은 드렸지만 그래도 밥은 먹으러 와야 하는 거 아니냐고 잔소리를 하셨다.

 그때에는 그런 잔소리를 듣는 것이 무척 피곤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부모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할머니께서는 어릴 때부터 유독 나를 이뻐하셨다고 한다. 가문의 종손이라 그런 걸까. 어릴 적 어쩌다 할머니집에 놀러 갈 때면 다른 동생들도 있었지만 집에는 항상 내가 좋아하는 과자는 빼먹지 않으셨다.


 대학생이 되어 같이 생활하게 된 뒤로도 고기반찬을 좋아하는 날 위해 저녁마다 삼겹살을 구워주셨고 주말이 되면 아침 일찍 시장에 나가 옛날통닭을 사 오셔서 같이 나눠드셨다.


 그 사랑을 당연하게 여기면 안 됐었다.




 그날은 기말고사 시험과 『2015 Bixpo 대학창의발명대회 공모전』준비로 스트레스가 쌓여 많이 예민한 상태였다.

 집에 도착해 시간을 보니 오후 9시. 어두컴컴한 방에서 침대에 누워 TV를 보고 계시는 할머니께 인사를 드린 후 옷을 갈아입고 샤워를 했다.

 샤워 후 내 방에서 쉬고 있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화장실에 들어갔다 나오신 할머니께서 고함을 치셨다.


"OO아! 화장실 쓰려면 신발에 물 좀 안 묻게 해라!"


 그때 깨달은 사실이지만, 할머니께서는 평소 보일러를 끄시고 보온양말을 신고 다니셨다. 그래서 화장실 슬리퍼에 물이 묻어있으면 양말이 젖기 때문에 하신 말씀이었다. 단순히 물 좀 안 묻게 해 달라는 그 얘기가 그때 당시엔 왜 그렇게 기분 나쁘게 들렸는지 모르겠다.


"아니, 샤워를 하는데 어떻게 신발에 물을 안 묻게 해요?"


그간에 쌓였던 스트레스가 폭발하고 말았다. 하지만 윤리적으로나 인륜적으로나 그 스트레스가 향하는 곳은 한참 잘못됐었다.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라는 말이 있던가. 나는 할머니의 과분한 사랑에 눈이 멀어 옆에서 누구보다 나를 사랑해 주신 분께 상처를 주고 말았다.


 놀란 표정으로 말을 잇지 못한 채 할머니가 방에 들어가신다. 곧이어 들리는 훌쩍이는 소리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다음날부터 할머니께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 없던 일처럼 다시 따뜻하게 대해주셨고 괘씸하게도 나는 준비하던 공모전을 잘 마칠 수 있었다.


그때, 죄송하다고 제대로 사과 한 마디라도 할걸.




 할머니는 현재 치매를 앓고 계신다. 치매는 무서운 병이다. 삶의 기억을 과거에 묶은 채 미래로 나아갈 수 없게 한다. 그래서 본인은 괜찮지만 옆에서 돌봐주는 주변 사람들을 병들게 한다.


 치매증상이 심해지신 할머니를 맏이인 아버지가 집에서 2년간 모셨지만, 극심한 스트레스로 오히려 아버지와 어머니의 건강상태가 악화되었고 결국 할머니를 요양원으로 보내드려야 했다.


 종종 가족들과 요양원으로 면회를 가면 마음이 먹먹하다. 이제 할머니는 내 동생들을 잘 기억하지 못하신다.

 하지만 나만큼은 잘 기억해 주신다. 단, 여전히 7년 전 집에서 같이 삼겹살을 구워 먹던 대학생으로.


"공부는 잘하고 있어?"

"할머니, 저 졸업한 지가 벌써 6년 전이예요."

"아이고 그래? 색시(여자친구)는 사귀었고?"

"저 작년에 결혼했어요......"


 면회 때마다 같은 레퍼토리이다. 할머니 기억 속의 나는 여전히 졸업을 준비하는 대학생이었고 아무리 설명드려도 찾아올 때마다 기억은 제자리로 돌아왔다.


 과거 내가 할머니께 남긴 상처는 더 이상 기억에 남지 않은 추억의 잔류물이 되었지만, 나에게는 삼겹살을 구워 먹을 때마다 떠오르는 여전히 선명한 기억이다.


 혹시 주변에 누군가에게 상처를 줬다면 가벼운 사과 한 마디라도 건네길 바란다. 어쩌면 오늘이 그 말을 전할 수 있는 마지막 날일지도 모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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