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0년차 베테랑 엄마라 누구보다 손이 빠르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하루가 아침부터 밤까지 꽉 차있다. 일어나자마자 가족들 아침 챙기고, 집안일 도맡아 하고, 아이들 학교 보내고 나면 그때서야 잠시 숨 돌릴 틈이 생긴다. 하지만 그 잠깐의 여유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해야 할 일은 끝없이 생겨나고, 어느 순간부터 나의 개인 시간은 희미해져 버린 것 같다.
책? 그거야말로 나에게 사치처럼 느껴졌다.
"독서가 참 유익하다"고는 다들 말하지만, 그걸 모르는 사람이 어딨나? 문제는 언제 그 유익한 독서를 할 시간이 있냐는 것이다. 하지만 어느 날 문득 생각했다. 나도 예전에는 책을 참 좋아했는데, 그 땐 어쩜 그렇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책에 빠져들 수 있었을까? 그러다 이런 문장을 접하게 되었다.
"책 읽는 것을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말고, 온갖 재료로 가득한 한 상 차려주는 대접 받는 것처럼 생각하라."
이 문장이 내 마음을 툭 건드렸다. 그때부터 나는 책을 '부담'이 아니라 '대접'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마치, 내가 매일 밥상을 차리듯, 책이 나를 위한 특별한 밥상을 차려준다고 생각하니 좀 더 친근하게 느껴졌다.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완벽주의를 내려놓는 것이었다. 어차피 집안일이란 게 끝이 없듯, 책도 '끝까지' 읽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요리책을 보듯 필요한 레시피만 보고 덮을 수 있고, 소설이라도 끝까지 얽매일 필요 없이 마음에 드는 챕터만 골라 읽으면 되는 것이다. 나 혼자만의 규칙을 세우고 나니, 책 읽기가 훨씬 가벼워졌다.
또 하나 깨달은 것은 책을 한 권만 읽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난다는 것이다. 요리도 메인 요리, 반찬, 국이 따로 있듯, 책도 여러 권을 한꺼번에 읽으면 더 재밌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은 자기 전에 소설을 한 챕터 읽고, 내일은 카페에서 잡지를 넘기고, 아이들 기다리며 요리책에서 새로운 레시피를 찾아보는 것처럼. 책 읽기는 내 일상 속에 자연스럽게 섞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중요한 팁 하나 더. 나는 책을 집안 곳곳에 '놓아두기' 시작했다. 소파 옆 테이블, 침대 옆, 부엌 식탁, 심지어 화장실에도 몇 권 놔뒀다. 의외로 생각보다 자주 손이 가더라. 티브이를 보다가도, 잠깐 앉아 있을 때도, 여기저기 놓여 있는 책이 나를 자연스럽게 불러냈다. 누군가 "책을 읽어라!" 하고 압박하는 게 아니라, 책이 나에게 "잠깐 한 장 넘겨볼래?" 하고 속삭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렇게 책과의 관계가 달라지니, 독서는 어느새 나에게 더 이상 '해야 할 일'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이 되었다. 마치 매일 내가 가족들을 위해 차리는 밥상에 내가 초대받아 앉아있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차려진 책의 상에서 한두 조각씩 천천히, 맛있게 음미해 가는 거다.
전업주부로서 매일 바쁘게 살지만, 책은 나를 잠시 다른 세상으로 데려다준다. 아이들 간식 준비하면서도, 빨래를 돌리면서도, 짧은 문장 하나에 웃고, 가끔은 생각에 잠긴다. 이젠 독서가 내 삶의 활력이 되고, 조금 더 여유롭고 풍성한 '밥상'처럼 느껴진다.
오늘도 내 삶의 책상이 풍성하다.
ㅣ출처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