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중 공모자 03화

3. 해리성 기억상실

공모자

by Bookish

새벽 5시 53분.


겨울이 끝나고 밤이 짧아졌다고는 하지만 어둠이 걷히려면 조금 더 시간이 필요했다. 살짝 열린 창문 사이로 축축한 바람이 차가운 새벽 공기와 함께 방 안으로 조용히 밀려왔다.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듯한 씨꺼먼 회색빛을 하고 있었다.


승호는 머리가 깨질 듯한 날카로운 통증을 느껴서 잠에서 깼다. 밤새 방 안으로 스며든 차가운 공기 때문인지, 어젯밤 마신 술 때문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는 자기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신음소리를 뱉었다. 양손으로 관자놀이를 누르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입안에서는 알 수 없는 불쾌한 단맛이 느껴졌다.


벽을 짚으며 가까스로 냉장고로 향했다. 냉장고에서 반쯤 남은 생수병을 꺼내 마치 연가시에 감염된 곤충처럼 정신없이 물을 넘겼다. 왜 반이 남았지? 시원한 물이 식도를 따라 내려가자 정신이 조금씩 돌아왔다. 생수병을 전부 비우고 나서야 천천히 눈을 떴다.


어젯밤 포장마차에서 도형이 그를 부축해 일으키던 장면까지만 기억났을 뿐, 그 이후에 집까지 어떻게 돌아왔는지는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그 순간 차갑게 밀려 내려간 물이 위장을 자극한 듯 갑자기 참을 수 없는 욕지기가 몰려왔다. 그는 급히 손으로 입을 막고 휘청거리며 화장실로 달려갔다. 변기를 붙잡고 머리를 그 속에 집어넣었다. 입안에서 분홍빛 걸쭉한 액체가 쏟아졌다. 끈적한 타액만 나올 때까지 몇 차례 반복해서 헛구역질을 하고 나서야, 힘없이 변기 옆에 기대 주저앉았다.


매번 이런 식이었다. 필름이 끊길 정도로 술을 마신 다음 날이면 온갖 투덜거림과 함께 절대로 이러지 않겠다는 다짐 하지만, 항상 반복되었다.


이번에는 반대로 입안에서 쓴맛을 느껴 천천히 세면대로 향했다. 물을 틀기 위해 수도꼭지로 손을 움직였다. 손가락 끝에서 이상한 감촉이 느껴졌다. 그는 끈적이는 느낌에 조심스레 손을 눈앞으로 가져왔다.


화장실 불빛에 적응되지 못해 뿌옇게 보이던 시력이 적응한 듯 조금씩 손 끝으로 초점을 맞출 수 있었다. 손가락 끝에 선명하게 묻어있는 붉은색 액체가 보였다.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피?


손끝에 묻어 있는 붉은 자국을 보는 순간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식은땀이 등골을 타고 내렸다. 오싹한 기운이 온몸에 퍼졌다. 심장이 미친 듯이 쿵쿵거렸다. 거칠어진 숨소리를 느꼈다. 그리고 그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거울 속에 비친 그의 얼굴 한쪽에도 피가 묻어 있었다. 턱에도 묻어있고, 손과 팔에도 묻어있었다. 피가 어디서 묻은 건지, 그리고 누구 것인지 전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이게 어디서 묻었지... 어제 술 먹고 오다가 다친 건가... 포장마차 이후 기억은 마치 가위로 자른 듯이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는 얼굴과 팔 뿐만 아니라 몸 구석구석 더듬으며 통증이 있는 곳을 찾기 시작했다. 통증이 느껴지는 곳을 발견하지는 못했다.


두려움에 휩싸인 채 피가 묻은 부분이 벌게지도록 문질러 씻었다. 다른 곳은? 그는 몸에 걸쳐있는 모든 것을 제거했다. 온몸을 샅샅이 살펴봤다. 아무런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


집에서부터 시간을 거슬러 기억을 끄집어 내려 애썼다. 브레인 포그! 피로감과 우울감이 함께 밀려왔다. 기억이 날 듯하면서도 술 때문인지 머릿속이 희뿌옇게 변했다.


도형이가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는 겨드랑이 사이에 팔을 넣어 나를 일으켰다. 어깨에 양복 상의를 걸쳐 주었다. 그리고는 포장마차 밖으로 나왔다. 갑자기 길이 어두워졌다. 그리고는 기억이 없다. 아. 저기 누가 누워 있는데? 아직 밤공기는 찬데. 저기 있으면 안 될 텐데. 그다음 장면은 도형이 아닌 내가 팔을 부축하는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리고는 그게 끝이었다. 다시 머릿속은 안개로 가득 찼다.


도대체 간 밤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얼굴에 피가 묻은 줄도 모르고 다녔을까. 또다시 믿음직스럽지 못한 술에 대한 비난을 입 밖으로 중얼거렸다. 억지로 피에 대한 생각을 지우려 했지만 뭔가 모를 찝찝한 불안감이 계속 남아 있었다. 다행히 쿵쿵거리는 소리를 내던 심장은 이제 두근거리는 소리로 바뀌었다.


그에게서 묻었으리라 결론 내리며 기억의 되새김을 멈췄다. 피에 대한 생각의 문을 닫으니 위장의 문이 열렸다. 허기가 밀려왔다. 얼큰한 국물이 생각났다. 이럴 때는 뜨끈한 콩나물 국에 고춧가루를 타서 마시면 속이 풀릴텐데.


비록 이날은 토요일이지만 사무실에 나가서 프로젝트 완료 보고서를 작성해야 했다. 자물쇠가 달린 사무실 책상 서랍 속에는 어제 쓰다만 보고서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 신약개발 프로젝트는 투입된 개발비용도 엄청났고 개발 기간도 거의 십 년 가까이 소요된 일이라 마무리를 잘 지어야 했다. 근무 평점을 높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다른 팀에서 거부한 온갖 지저분한 프로젝트는 모두 자신이 담당해서 처리했지만 사내 정치놀음에 휘말려 번번이 진급에서 누락했었다. 심지어 잘 끝냈음에도 불구하고 아주 약간의 일정에 차질만 생기면 그 비난은 온통 승호를 향했다. 어떻게든 이번 기회를 이용해야만 했다.


하지만 팔 하나도 들 힘이 나지 않았다. 빨리 나가지 않아도 되는 토요일이라는 핑계를 자신에게 주며 다시 침대로 향했다. 침대에 누워 창문 사이로 밀려드는 서늘함에 이불을 얼굴 바로 밑까지 끌어올렸다. 포근했다. 이불 밖으로 한 손만 꺼내 옆에 있던 리모컨을 잡았다. 빨간색 전원 버튼을 누르자 까만 tv 화면이 밝아지고 화면에서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저기 어디서 본 곳인데... 화면에 보이는 장소가 낯설지 않고 어딘가 익숙했다. tv속 골목 입구에는 노란 줄이 거미줄처럼 엉켜있었고, 그 앞에는 경찰 두 명이 몰려드는 구경꾼과 기자로 보이는 사람들을 막아내며 귀찮은 표정을 지었다. 거미줄 안쪽에는 흰색 천 한쪽 귀퉁이가 잠깐 화면에 나왔다 사라졌다. 골목을 비추고 있던 카메라는 기자를 비추었다. 기자는 양손에 수첩과 마이크를 들고 있었다.


"오늘 새벽 서울 OO구 골목에서 20대 남성이 심정지 상태로 발견되었습니다. 소방에 따르면 최초 발견자 신고를 받고 급히 근처 병원으로 이송하였지만 결국 사망하였습니다. 경찰은 근처 cctv를 조사하는 한편, 목격자와 주변인들을 중심으로 사망 경위를 조사하고 있습니다."


기자는 매일매일 연속되는 끔찍한 업무가 익숙해졌는지 무덤덤한 표정으로 사건 내용을 전했다. 승호는 화면 속 골목을 유심히 살펴봤다. 그곳은 아무리 생각해도 눈에 익은 장소였다. 아. 버스 정류장 옆 큰 건물 뒤쪽 작은 골목. 그 익숙한 골목은 그가 살고 있는 아파트 전셋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매일 출퇴근할 때 지나쳐 가던 골목이었다. 바닥에는 담배꽁초가 수북이 쌓여 있고 구석마다 침 자국이 시꺼멓게 얼룩져 있는 곳. 다른 곳과는 달리 어둡고 기억에 남아 근처를 지나다기기 꺼려졌지만 가장 빠른 길이라 참고 지나다녔다.


요 며칠 동안 뭔 공사를 하고 있는지 골목 안쪽이 어수선했던 했다. 그곳을 지나쳐갈 때마다 한쪽에 쌓여 있던 시멘트 포대에 남아있던 회색 가루, 누런 모래와 자갈 때문에 비가 오게 되면 꽤나 질퍽거리겠다고 생각했었다. 그 흙탕물이 큰길까지만 흘러나오지 않기를 바랐다. 분명 그 지저분한 흙물을 밟으면 얼마 전에 비싸게 주고 산 구두가 엉망이 될 것이 틀림없었다.


기자와 같은 마음이었을까? 승호 역시 자신과는 별 상관없는 일로 느껴졌다. 리모컨 채널 변경 버튼을 눌러봐도 별 다른 재미있는 내용은 없었다. 이리저리 눌러보다 tv 홈쇼핑에서 갈비탕을 파는 장면에서 손가락이 멈췄다. 문득 속 쓰림을 느껴 몸을 다시 일으켰다. 리모컨을 침대 위에 던져놓고 주방으로 향했다.


주방 식탁 위에 검은색 비닐봉지가 보였다. 술 취한 와중에도 뭔가를 사 왔나 보다. 그는 용케 자신에게 잘했다는 칭찬을 하며 식탁으로 다가갔다. 뭘까? 뭐든 상관없었다. 단지 해장거리가 있기만을 기대했다. 봉지 안쪽으로 손을 넣었다. 바스락 거리는 소리를 기대했지만 예상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 손 끝으로 전해왔다.


차갑고 딱딱한 물건이다. 순간적으로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남아 있는 다른 손으로 봉투를 잡고 조심스럽게 딱딱한 물건을 끄집어냈다. 물건을 보고 너무 놀라 손에 힘이 풀리며 그것을 떨어뜨렸다.


물건은 바닥에 떨어지며 무겁고 둔탁한 소리를 냈다.


"쿵!"


승호는 떨어진 벽돌과 함께 심장이 내려앉았다. 가슴을 쥐어짜는 듯한 통증과 숨을 쉬기 힘들었다. 한쪽 면을 덮고 있던 검붉은 색. 또?


검붉은 색이 피라는 것을 알아챈 순간 그는 꼼짝할 수 없었다. 현기증이 나서 쓰러질 것 같았다. 식탁 한쪽을 팔로 짚으며 간신히 버텼다. 잠시 벽돌을 바라보다 집어 들었다. 한쪽에 묻어 있던 검붉은 것은 피가 틀림없었다.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동안 실험을 위해 수없이 많이 보아온 것이라 잘못 볼 수가 없었다. 심지어 이것은 아직 다 굳지도 않아 끈적거리는 상태였다.


처음으로 머리 뒤쪽이 찌릿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온몸의 털이 다 일어섰다. 겨드랑이 안쪽이 축축해졌다.


방금까지만 해도 쓰린 속과 두통 때문에 고통스러웠지만, 지금은 그 고통을 느낄 수 없었다. 만약 고통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이게 왜 여기 있고, 이 피가 누구 것인지가 더 궁금했다. 승호는 다시 한번 몸을 더듬어 보고 있었다. 만약 다쳤다면 어딘가는 쓰리거나 따가운 고통이 있어야 했지만 아무 데도 아프지 않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고 머릿속은 하얘졌다. 온몸은 떨리고 호흡은 가빠졌다. 그는 손에 쥔 벽돌을 가지고 급히 화장실로 가서 물로 씻었다. 자신도 왜 씻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벽돌을 물로 씻는 동안 세면대 속으로 검붉은 색 액체도 같이 씻겨 내려가고 있었다. 누가 보면 안 되는데... 이걸 어디다 숨겨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냉동실? 화분밑? 아니, 그냥 밖에 던져버릴까? 별별 생각을 다 해봤지만, 당황해서 그런지 얼굴빛처럼 하얗게 변한 머릿속에서는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았다.


도대체 어젯밤 일에 대해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이 벽돌이 왜 집에 있는지. 그리고 왜 피가 묻어 있었는지. 또 얼굴과 손에는 왜 피가 묻어 있었는지 모든 것이 기억나지 않았다. 예전처럼 또 기억이 안나는 증상인가. 그는 그냥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


해리성 기억상실. 그는 고등학교 때 사건 이후로 가끔 기억 일부분이 비어있는 경험 하곤 했다. 한 동안은 그런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했지만 증상이 심해져 병원에서 진찰을 받았다. 그 이후로 조심하며 살아서 그랬는지 다행히 최근 몇 년 동안은 증상을 느낀 적이 없었다. 오랜만에 받은 충격 때문에 더욱 당황스러웠다.


바로 그때 휴대전화 벨소리가 작은 공간을 가득 채웠다. 침대 위에서 소리를 내는 휴대전화 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떨리는 휴대전화만큼 승호의 심장도 같이 뛰었다. 누구지... 이 시간에 전화할 사람은 없는데 대체 누구지? 채인이? 승호는 마른침을 삼키며 천천히 발을 움직여 침대로 다가갔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평생 처음 써 본 글입니다. 많이 어설프고 형식에도 맞지 않은 글이지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장소 및 사건은 완전히 허구이며, 실존 인물, 생존자 또는 사망한 인물, 사건, 기관, 단체 및 기업과의 유사성은 전적으로 우연의 일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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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