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모자
승호는 이 원장과 헤어진 후 멍한 표정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아직 피부관리숍에 남아 있던 패치는 이 원장이 폐기해 주기로 했다. 아무래도 이 그녀가 처리하는 것이 좀 더 완벽할 것 같았다.
집에 들어서자 그는 거실 소파에 쓰러지듯 길게 누웠다. 베란다 커다란 유리창을 통해 축축한 어둠이 밀려들었다. 곧 비라도 내를 듯한 밤이었다. 그는 이마에 팔을 올리고 눈을 감았다. 힘든 하루를 반영하듯 긴 한숨이 천천히 흘러나왔지만 여전히 가슴은 빠르게 뛰고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그는 천천히 눈을 뜨고 두 손을 들어 바라보았다.
손 끝이 떨리고 있었다. 두려웠다. 하지만 이 손으로 사람을 죽였다. 그것도 두 번이나. 아무리 악독한 죄를 지은 인간이라 해도 결국 자신과 다를 바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손 끝에 남은 느낌은 마치 모기를 손바닥으로 짓눌러 죽인 것처럼 그 어떠한 죄책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 한편에서는 불안감이 자라고 있었다. 첫 번째 살인은 기억조차 명확하지 않으니 판단을 할 수 없었지만, 두 번째 차 의원은 명백히 이성적이고 계획적으로 저지른 행동이었다. 그 행동에 다른 고려사항은 없었다. 단지 채영을 위한 것이었다.
결국 이 원장의 말이 맞았다. 이 썩어빠진 도시에는 영웅이 필요했다. 그가 영웅이 될 필요는 없었지만 지금 그 어디에서도 그 역할을 할 수 있는 존재가 없었다. 내가 영웅이 되어야겠다. 비록 한계가 많겠지만 이 도시의 베트맨이 되기로 했다.
죄책감이라는 것을 그의 마음에서 찾기 어려웠다. 오히려 그런 감정은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 방해만 될 뿐이었다. 감정을 마음속에서 걷어내자 편안해졌고 자신감이 차 올랐다. 이제 어떤 일이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그렇게 소파에 누운 채로 깊은 잠에 빠졌다.
사방은 어둡고 낯선 숲이었다. 처음 와보는 곳인지 익숙한 느낌이 전혀 없었다. 숨은 거칠어지고 발걸음은 힘게 겨웠다. 발 밑에서는 끊임없이 나뭇가지와 덩굴이 얽혀 그의 발을 감고 있었다. 걸음을 내디딜수록 바스락 거리는 소리와 습기에 찬 어둠이 그를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끌어당겼다.
갑자기 깊은 어둠 속에서 기척을 느꼈다. 공포가 온몸을 짓눌러 터트릴 것처럼 몰려왔다. 검은 기운이 승호를 감쌌다. 기척이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희미한 그림자들이 천천히 그를 행해 다가왔다. 그림자들이 점점 형태를 갖추며 또렷해졌다. 이내 또렷해진 얼굴은 최수철과 차대서 의원이었다. 두 얼굴이 그에게 다가왔다. 두 사람은 비웃듯이 승호를 내려다보았다.
"네가 뭔데?"
두 얼굴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네가 뭔데 우릴 심판해! 네가 그럴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
승호는 눈을 감고 두 손으로 귀를 막았지만, 그 소리는 귀가 아니라 머릿속에서 울려 퍼졌다. 막을 수가 없었다.
"너도 결국 우리와 같아. 똑같은 살인자 아냐? 법을 안 지킨 건 너도 마찬가지 아냐?"
승호는 그들과는 다르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을 위한 변명거리를 찾을 수 없었다. 자신감 있던 모습은 점점 허물어지고 있었다. 다리에 힘이 빠져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고개를 떨구었다. 어깨가 떨렸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흐느꼈다. 깊은 후회가 밀려왔다.
"벌써 포기하려고? 겨우 이까짓 것들 때문에?"
부드럽고 맑은 목소리가 들여왔다. 익숙한 소리였다. 채인이었다. 승호는 고개를 들어 목소리가 들리는 곳을 바라보았다. 짙은 어둠 속에서 따스한 빛이 나타났다. 그 빛이 점점 커지면서 얼굴이 생기고 팔다리가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이윽고 채인의 모습이 나타났다. 슬픈 미소를 머금은 그녀의 모습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네가 아니어도 되지만, 아무도 하지 않는 일이야! 그리고 이건 단순한 복수가 아니야. 그리고 아직 안 끝났어."
목소리는 작고 희미했지만 흔들림 없이 명확했고, 그의 가슴속에 깊이 박혔다. 그리고 따스한 기운이 그의 온몸을 감쌌다. 그의 몸에서 빛이 차올랐고 어둡던 두 그림자는 그 빛에 밀려 사라졌다.
"그래. 이건 복수가 아니라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다. 아무도 하지 않던 그 일!"
승호는 천천히 일어났다. 그의 눈빛에는 확신이 차 올랐다. 주변을 감싸던 어둠은 모두 사라지고 숲길의 끝에 밝은 빛이 보였다. 승호는 그 빛을 행해 걸었다. 그의 발걸음에 힘이 들어갔다. 그가 걸을 때마다 그의 발을 잡고 있던 어둠의 손은 하나씩 뜯겨 나갔다.
마침내 숲을 빠져나와 밝은 빛 앞에 섰다. 그의 심장은 이전과 다르게 뛰고 있었다. 힘차게 뒤고 있었지만 그 어떤 때 보다 안정적이고 규칙적이었다. 승호는 더 이상 죄책감이나 후회의 감정이 없었다. 그 자리에 강한 결심과 신념으로 가득 채워졌다. 더 이상 흔들리지 않은 것이다.
그는 그 빛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 빛에 손이 닿는 순간 빛이 모든 공간으로 퍼져나갔다.
어젯밤 내리던 비는 새벽이 되자 그쳤고, 창문으로는 환한 햇살이 따뜻하게 비치고 있었다. 그는 채영을 보낸 후 처음으로 악몽을 없이 개운하게 잠에서 깨어났다. 그동안 먹는 음식마다 모래를 씹는 듯한 느낌이 들어 제대로 먹지도 못했고, 배고픔을 느끼지도 못했었다. 하지만 이날 아침은 허기를 참을 수 없을 만큼 강하게 느꼈다. 냉장고를 뒤져 먹을만한 것들은 모두 꺼내 허겁지겁 배를 채웠다.
그 어떤 아침보다 기분 좋고 만족감이 느껴지는 아침이었다.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했어. 그게 원래 법과 정의라는 것이 해야 하는 일이었어. 하지만, 그 법과 정의가 제대로 된 역할을 하지 못해서 벌어진 일이야. 차 의원 같은 인간들은 끊임없이 나타날 텐데 누가 막을 수 있을 것 같아? 누구든 막아야 해!
그의 시선이 천천히 거실 한쪽의 책장으로 향했다. 책들이 서로 뒤섞어 꽂혀 있었다. 그들 중 흰색 표지의 책이 눈에 들어왔다.
정의란 무엇인가
정의? 그런 건 처음부터 없었다. 그는 책을 꺼내 반으로 찢은 후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런 건 이제 이 세상에 없다. 아니 그전부터 없었지만, 약자들이 스스로에게 위로를 삼기 위해 만들어낸 정체불명의 단어일 뿐이다.
지금껏 모두 결국 세상은 올바르게 흘러갈 것이라는 희망을 믿고 살아왔다. 그 역할은 정의가 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제와 돌이켜보면 정의는 허울 좋은 껍데기만 있는 아무런 힘이 없는 존재였다. 법을 비롯한 그 어떤 것도 약자의 편은 아니었다. 힘 만이 보호해 줄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차 의원 같은 권력을 가지고 법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자들이 진짜 저질렀고, 법은 그 모습을 빤히 보고만 있는 것을 넘어 오히려 그런 놈들을 보호하고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최수철 같은 넘들이 어떻게 그런 짓을 하고도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을 수 있었을까. 결국 피해자는 전혀 보호받지 못했다.
그는 그동안 가해자 인권 운운하며 그들의 모습을 감추고 오히려 피해자들의 생활을 파해쳐 2차 가해가 이루어지는 것을 수없이 봐 왔다. 악순환을 끊고 싶었다. 죄를 지은 범죄자들은 그에 맞는 합당한 벌과 고통을 받아야 하며 피해자는 편히 쉴 수 있어야 했다. 아무도 그 역할을 하지 않았다.
채인이는 죽었어. 그 앞에서 법이라는 것이 무슨 역할을 했지? 착하게만 살아온 채인이는 죽었고, 차대서는 여전히 뻔뻔하게 같은 짓을 이 원장에게 저질렀어. 음탕하게 웃으면서. 그 순간 법이라는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되었어. 내가 그 일을 해야 해
한 번 더... 아니 몇 번이라도...
그의 손끝이 바르르 떨렸다. 하지만 이제는 웃고 있을 채인의 모습이 떠 올랐다. 손의 떨림은 멈추었고, 주먹에 힘이 채워지는 것을 느꼈다. 눈을 감았다. 사천왕상. 악귀를 밟고 늠름한 모습으로 서 있는 사천왕. 그 사천왕의 얼굴이 점점 자신의 얼굴로 바뀌는 모습을 보았다. 끝이 어떻게 될지는 생각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 생각 만으로도 온몸 구석구석에 힘이 들어가고 머릿속이 명확해졌다. 죄책감이라는 것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단지 자신만이 할 수 있을 것 같은 희열만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세상에 차 의원 같은 사람들은 넘쳐날 거야. 어차피 난 두 사람이나 없앴어. 이 세상에서 몇 명 더 없어진다 해도 다를 것 없어. 증거도 안 남았잖아. 계획만 치밀하면 그 어떤 사람도 의심하지 못해. 봐. 경찰도 최수철이나 차 의원에게서 아무런 증거도 못 찾았잖아. 완벽하게 할 수 있어.
그의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내가 정의가 될 거야. 정의가 못된다면 악마가 되겠어. 그들이 공포심에 떨도록.
그 순간 채인의 얼굴이 떠올랐고 채인의 예전 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녀가 그렇게 힘들게 지내는 동안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고 도와줄 수 있는 것도 없었다는 것이 후회로 밀려왔다. 조금만 더 신경을 썼더라면, 조금만 더 많이 얘기를 했었더라면 알 수도 있었을 텐데.
정신이 맑아졌다. 이젠 해야 할 일이 명확해졌다. 이제 다음 목표를 찾으면 된다. 가장 악독한 놈으로, 가장 비열한 놈으로. 그는 소파에 앉아 노트북을 열었다. 인터넷을 열고 최근 뉴스를 찾아보며 다음 목표를 살펴보았다.
"... 경기도 소재 아파트 15층에서 50대 남성이 아래 하단에 추락해 숨졌습니다. 이 남성은 경기도 소재 한 화학공장에서 폐수를 무단 방류한 것으로 의심되어 그동안 경찰 자소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의 눈에 차갑고 단호한 빛이 반짝였다.
평생 처음 써 본 글입니다. 많이 어설프고 형식에도 맞지 않은 글이지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