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모

by 랑랑

충북 진천으로 향했다. 잦은 입원과 치료로 너덜너덜해진 몸과 마음에 환기가 필요했다. '생거진천' 살기 좋은 동네 아니던가. 물 맑고 공기 좋은 시골 동네를 떠올렸지만 아파트와 각종 문화시설이 빽빽이 들어서 다른 의미로 살기에 좋은 충북혁신도시로 갔다. 2년 전 이직과 동시에 삶의 터전을 옮긴 동생네 집에서 며칠 묵으며 요양할 생각이다. 2살 터울에 살가운 구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무뚝뚝한 여동생은 내가 먹고 싶은 게 있다고 할 때마다 질색을 하면서도 다 요리해 주고 사다 주었다. 면역도 올라오고 입에 쓴맛도 얼추 사라져 이제야 조금 사람 사는 기분이 들었다.


몸에 제법 활력이 돌기 시작할 무렵, 동생네 집과 차로 20분 거리에 떨어져 있는 농다리로 향했다. 중부고속도로를 오가며 자주 내려다보았던 농다리가 불현듯 떠올랐다. 3월이지만 아직은 겨울에 가까운 날씨 때문인지 주말 농다리는 생각보다 한산했다. 가까이에서 보니 더욱 멋들어진 농다리를 한 칸씩 밟아보았다. 그저 개천에 쌓은 돌다리가 전부인 줄 알았는데 돌다리 너머로는 꽤 많은 산책 코스가 합쳐 커다란 관광단지가 조성되어 있었다. 언덕을 넘어 야외 음악 공연장에 다다랐다. 그거 조금 걸었다고 이마에 땀이 송송 맺혔다. 오래간만에 흘리는 땀에 상쾌한 기분으로 이마부터 머리를 쓸어 넘기는데 손에 무언가 존재감이 남는다.


'이제 올 것이 왔구나.'


한 번 쓸어 넘긴 손길로 절대 빠질 수 없는 양의 머리카락이 손바닥에 묻어 있었다. 더욱 신기한 것은 머리카락이 모근째 빠진 게 아니라 중간에 끊긴 듯 가지런했던 것이다. 항암 후 정확히 열흘이 지난 후 시작된 탈모였다. 저녁에 퇴근해서 돌아온 동생 앞에서 머리를 한번 훑어 손바닥을 펴 보여주며 '신기하지?' 물어보았다.


"치료 끝나고 또 기르면 되지."


동생다운 대답이었다.



탈모가 시작된 지 3일이 되었다. 물처럼 흘러나오는 머리카락 때문에 감히 머리를 감기도 무서웠다. 마치 포스트잇 한 장 떼는 것처럼 머리카락은 부드럽게 빠졌다. 어느새 정수리는 왕복 8차선 도로로 넓어졌다. 구레나룻과 뒷덜미는 가렵고 정수리는 머리채를 세게 잡힌 듯 아프다. 옷을 갈아입을 때마다 붙어 내려가는 머리카락에 옷 속으로 손을 넣어 휘적거리며 머리카락을 빼낸다. 자고 일어나면 베개와 침대에 머리카락이 한가득이다. 방바닥을 여러 번 쓸어도 머리카락은 그대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원래 머리카락 관리에 별 관심이 없어서 항상 질끈 묶거나 짧게 자르고 다녔던지라 머리가 빠져도 크게 우울하지 않았다. 오히려 신기했다. 항암이 끝난다고 해서 이렇게나 무자비하게 빠지는 머리카락이 다시 나기는 할까. 정수리가 당기듯 아프고 불편함이 커서 차라리 그냥 한 번에 싹 다 빠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차 항암에 들어가기 전날 밤, 샤워로 머리카락을 왕창 흘려보내고 블라우스를 꺼내 입었다. 그리곤 화장대에 앉아 오랜만에 화장을 했다. 이 골룸 같은 머리도 단장을 하면 그럭저럭 봐줄 만할까? 대머리가 되고 나면 더 이상 거울 속의 내 모습을 거들떠보지 않을 것 같아 마지막으로 정성스럽게 단장을 했다. 눈썹을 진하게 그리고 블러셔로 볼을 톡톡 찍으니 혈색이 돈 것처럼 보기가 좋았다. 나쁘지 않군. 역시 난 머리빨이 아니었어.


2차 항암을 위해 입원에 앞서 먼저 담당 교수님의 외래가 있었다. 모자 속에 얼마 남지 않은 단발머리를 본 교수님은 삭발을 추천했다.

"머리 미는 게 두피도 당기지 않고 더 편할 거예요."


2차 항암이 끝나고 삭발을 하려고 했는데 울렁거리는 속으로 환자복과 침대 시트에 붙은 머리카락을 열심히 떼는 상상을 하니 끔찍했다. 외래가 끝나자마자 병원 건물 지하 미용실로 찾아갔다. 원장님의 안내에 따라 의자에 앉고 모자를 벗자마자 마음의 준비를 할 겨를이 없이 머리가 밀려 나갔다. 이 원장님은 하루에 몇 명이나 머리를 미는 걸까. 그저 별거 아닌 업무의 일부인듯 대수롭지 않게 머리를 박박 미는 거울 너머 원장님의 모습에 씁쓸했다.


"괜찮은데?" 거울 속 커다란 보름달 같은 머리통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말했다. 엄마는 아무 말이 없었다. 입원 시간에 맞춰 나는 병동으로 올라갔고 엄마는 다시 집으로 돌아와 나의 민머리를 혼자 가슴 아파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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