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일상

by 랑랑

2023년이 되었다. 작년 새해는 병실에서 일출도 보지 못하고 그냥 흘려보냈기 때문에 올해는 2년 치 새해를 몰아서 기념하기 위해 경주로 떠났다. 20대에는 새벽부터 태백산 등반도 하고 강릉 앞바다 숙소에 바가지 요금을 내가며 일출을 보는 등 새해 기념행사에 진심이었는데 그때 충분히 즐겨서 그런지 어느 순간 새해도 특별한 감흥없이 그저 지나간 하루 중 하나처럼 여겨졌다. 비록 홀로 나선 여행길이었지만 오랜만에 떠난 새해 기념 여행은 설렘이 가득했다.


드넓은 보문관광단지는 '왕년에' 날렸던 인기스타처럼 '관광단지'라는 이름값을 잃어버린 쓸쓸한 모습이었다. 상가는 대부분 텅텅 비어있었다. 주차장에도 빽빽한 주차칸이 무색하게 내 차를 포함해 손에 꼽을 정도로 몇 대 서있지 않았다. 거대한 보문호수를 둘러 잘 조성되어 있는 데크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호숫가에 바람이 강하게 불었다. 바람에 따라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날렸다. 그러고 보니 바람에 휘날릴 정도로 머리카락도 많이 길어 있었다. 항암치료로 다 빠진 머리를 새로 기른 거라고 말하지 않는 이상 그냥 취향껏 쇼트커트로 이발한 사람같았다.


경주 시내 한가운데 위치가 좋은 게스트 하우스를 예약했다. 1박에 2만 원짜리 게스트 하우스 4인실에는 대학생으로 보이는 예쁘장한 여학생 한 명이 먼저 와 있었다. 몇 번의 대화를 나눈 끝에 그녀는 대학생이 아닌 나보다 한 살 많은 거제시청 공무원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곱상한 외모와는 달리 거센 풍파를 겪은 그녀의 인생 스토리를 듣자니 세상에서 내가 제일 불행한 사람이라고 느껴왔던 지난날이 부끄러워졌다. 혼자서 그 많은 역경을 이겨내고 곧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혼을 앞두고 있다는 그녀의 미래가 꽃길뿐일 것 같아 부러웠다.


"연애하세요!"

완벽한 경남 사투리로 그녀는 단호하게 말했다.

"암 환자 주제에 무슨 연애예요."

"왜~ 내 친구도 유방암 수술했는데 지금 남자도 만나고 연애도 잘해요."

"아 그래요?"

"그래~ 연애 다 할 수 있어요. 이렇게 젊고 예쁜데."

확신에 찬 경남 사투리가 전혀 빈말로 느껴지지 않았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어느덧 시간은 밤 12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12시 타종 행사를 보러 가자는 그녀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하고 아침 새해 일출을 위해 먼저 잠을 청했다.


새해 일출 명소는 정동진만 있는 줄 알았는데 경주도 만만치 않았다. 문무대왕릉까지는 3km나 남았지만 도로는 벌써부터 주차장이 되었다. 결국 문무대왕릉은 표지판 구경만 원 없이 하고 도로 한가운데서 새해 일출을 보게 되었다. 그래 이것 또한 추억이다. 따뜻한 차 안에서 새해 일출을 맞이하고 해소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교통 체증에 문무대왕릉 입구에서 그대로 차를 돌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어제 그냥 거제시청 공무원 언니와 함께 타종 행사를 보고 아침 일출을 과감히 포기할걸 그랬나 싶었다. 일출을 보고 게스트하우스로 돌아와 언니에게 함께 아침식사를 하자고 할 계획이었는데 워낙 차가 밀려버리는 바람에 퇴실 시간 직전 간신히 도착했고 그녀는 이미 떠나고 난 뒤였다. 거제시청 홈페이지에서 그녀의 연락처를 찾아볼까 고민도 했지만 그냥 하나의 소중한 여행 에피소드로 남겨두기로 했다.




경주에서의 1박 2일은 짧았지만 2년 치 새해 기념행사의 갈증을 충분히 채우고도 남았다. 올해는 무엇을 잃게 될지 두렵지만 만약 같은 시련이 반복된다고 하더라도 너무 오래 슬퍼하지 않게 해 달라는 소원을 빌었다. 당장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는 사람은 없다. 로또에 당첨된 사람도 사고를 당한 사람도 집 밖을 나서기 전까진 자신의 인생이 이토록 한 순간에 바뀔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미래를 부정적인 쪽으로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지금 당장은 암 환자의 삶을 살고 있을지언정 내가 암으로 죽게 될지 사고로 죽게 될지 아니면 천수를 누리고 노환으로 죽게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암 환자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마찬가지다.


가끔 생판 모르는 사람의 빈소 사진이 SNS 추천 게시물로 뜨곤 한다. 암에 관련해서 일절 검색해 본 적도 없는데 어쩜 그런 게시물만 찰떡같이 찾아오는지. 이런 걸 보면 SNS 알고리즘이라는 건 참 징그럽게 소름 돋는 것 같다. 그동안 유명 연예인이나 인플루언서들이 갑자기 암에 걸려 결국 생을 마감하는 경우도 많이 있었다. 먼저 앞선 그들을 통해 나의 결말을 미리 알아보는 것 같아 두려웠다. 그러다 죽음은 선택적인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이라는 어느 유명인의 말을 떠올리며 조금은 편안 마음을 먹어보려 노력하기도 했다.


6월부터 '만 나이 통일법'이 시행되고 한국 나이가 없어진다고 한다. 11월 늦은 생일인 나는 11월이 오기 전까지 기존 나이에서 2살이나 빠지게 되는 것이다. 나이도 줄어들었겠다, 작년은 없던셈 치기로 했다. 1년 사이에 직장도 잃고 철없이 해맑던 성격도, 자부하던 체력과 건강도 잃었지만 작년에 어떠한 일이 이토록 삶에 많은 변화를 일으켰는지는 묻어두고 모른 척하기로 했다. 남보다는 나 자신을 먼저 생각하고 앞날보다는 당장 오늘에 집중하며 그저 행복하게만 살아보기로 했다. 단순하게 하루하루 살아가다 보면 잃었던 모든 것을 다시 되찾게 되는 날이 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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