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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밀림의 왕 수니 Sep 27. 2024

낀대의 부모 이야기 (3) - 그럼에도

키워주심에 감사합니다.

  

  공부 걱정이 없던 큰 아이는 중2가 되자, 게임에 빠졌다. 그저 흥미 때문으로 여기자니, 잦았던 남편과의 다툼이 떠올랐다. 마음의 탈출구를 필요케 한 것이 아닌지... 가슴 한구석이 쿡하고 쑤셔왔다. 아니면 단지 사춘기라 그랬을지... 굳게 닫힌 방문은 녀석의 마음마저 그래 보였다.


  하지만 이를 신경 쓰기엔, 눈덩이처럼 불어난 빚과 남편의 짜증이 시선을 앗아갔다. 안 되는 가게에 미련을 놓지 못하는 남편이 한심했다. 이에 아이들 앞에서 다투지 않겠다는 다짐은 매번 무너졌다. 고등학교 시절도 우리의 전쟁 속에서 보낸 아들은 수능에서 아쉬운 결과를 안았다. 하지만 기특하게도 늘 장학금을 받았고, 아르바이트로 용돈마저 벌어 썼다. 자기 몫이상을 하는 아들이 그저 고맙고 미안했다. 그리고 아들은 곧 군입대를 했다.

 

  딸아이는 첫째 덕에 확실히 수월했다. 오빠를 따라, 사교육 없이도 전교권의 성적을 받아왔다. 없는 형편에 걱정 하나는 덜었다. 둘째의 중3 무렵, 식당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피곤한 몸으로 돌아오면 집은 늘 엉망이었다. 화가 났다. 그 화살은 딸과 남편에게 향했고, 다툼의 이유가 또 하나 늘었다.


  어느덧 말이 좀 통하는 딸에게 하소연을 시작했다. 아이는 나를 이해했다. 내편이 된 아이에게 남편과 시댁 흉을 보면, 조금은 후련했다. 남한테는 차마 못하는 말도 실컷 할 수 있으니까. 그럼에도 남편이 주는 스트레스와 수입을 상계하는 병원비를 이유로 아르바이트는 오래지 않아 그만뒀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하지만 도저히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또다시 부업으로 생활비를 보탰지만, 적자를 늘리는 가게 탓에 소용없었다. 남편의 신용은 엉망이 됐고, 아파트를 팔아 겨우 마련했던 집마저 또다시 팔아야 했다. 남편은 고정지출이 나갈 때마다 온갖 트집으로 짜증을 부렸다.


  내 마음을 제일 잘 아는 친구 같은 딸에게,
서러움을 쏟으며 버텼다.


 꾸역꾸역 살아내는 날들이 모이니 어느덧 둘째도 고3이었다. 딸은 수시 몇 군데를 지원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남편은 개인 회생 중이었고, 원서접수 비용조차 마련할 수 없었다. 남편은 수능으로만 대학을 지원하라며 화를 냈다. 나 역시 결과가 아쉬워도, 오빠처럼 장학금을 받으며 다니는 것도 괜찮다는 말만 했다. 눈앞 현실에 딸아이의 의지를 챙길 생각은 못했다.


  말이 씨가 된 걸까? 둘째 고3 때도 여전했던 부부싸움 탓이었을까? 딸은 이전에 본 적 없던 등급을 받았고, 원치 않던 학교에 진학했다. 속상했을 테지만 다행히 야무지게 지냈다. 전 학년, 전액 성적 장학금으로 등록금 충당했고, 주말엔 아르바이트로 자격증 책을 사서 공부를 하더니 관련 장학금까지 모두 받아왔다. 그리고 졸업 후엔 스스로 편입학이라는 방법을 찾아갔다.


  둘 다 부족한 공부는 알아서 이어가고 용돈벌이도 하니, 줄어든 부담과 함께 급한 불은 어느 정도 꺼졌다. 그럼에도 남편의 성질머리와 우리의 싸움은 여전했다. 하지만 이제는 성인이 된 딸이 찰떡같이 나를 위로했다. 어떨 땐 남편에게 나 대신 통쾌하게 쏘아붙이기도 했다.


  나의 반쪽 같던 녀석이, 결혼을 말했다.


  나이차가 났던 남자친구 측에서 원한다고 했다. 고민이 됐지만, 여전히 어려운 형편이었기에 몇 년 후 결혼을 시킨다고, 금전적으로 더 준비할 확신도 없었다.


너는 이 지옥에서 벗어나서 좋겠다.
친정에서 있던 일 모두 잊고 마음 편히 잘살아.

  딸의 결혼식을 앞두고, 시원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그동안 미안했단 말에 앞서서 진심을 말했다. 지금보다 심적으로 편안 해질 테니 다행이다 싶었으니까. 고단했던 인생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그동안 나를 이해하던 딸에게 힘을 얻어 버텼던 날들 모두 다...



낀대의 다섯 번째 Solution.

한 발 떨어지기 : 부모의 역할을 떼고 그들을 바라보기

  상담 선생님이 내게 말했다. 부모가 자녀에게 한 행동이라 생각하지 말고, 어렵겠지만 역할을 떼고 보자 했다. 그리고 이 글을 적으며, 나는 그들을 부모라는 이름표를 떼 보았다. 안쓰러웠다.

  그럼에도 끝까지 이해가 안 됐던 건, 바로 위의 말이었다. 나살자고 엄마를 지옥에 버리고 혼자 도망친 비겁한 딸이 된 것 같아서였다. 그러니, 내 결혼 생활의 행복한 모습들은 보이면 안 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최근에 알게 됐다. 나를 뒤이어 오빠가 결혼할 때도 어머니는 오빠에게 똑같은 말씀을 하셨다는 것을... 그리고 이 말이 자식들에게 그렇게 닿을 수도 있었단 것을 전혀 몰랐다며 사과하셨다.

  나의 어머니도, 본인의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었다. 그들 역시 낀대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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