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텔-드-빌 길을 따라 다시 부르 드 푸르 광장에 들어서 에티엔뒤몽 길Rue Etienne-Dumont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면 타바잔 길Rue Tabazan이라는 좁은 골목길이 나온다. 그곳에 교회 하나가 자리하고 있다. 오라토리아 교회Eglise Oratoire이다. 보통 문은 굳게 닫혀있어 들어갈 수는 없다.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이곳 — 우리가 여기에 온 이유는 무엇일까? 이곳이 바로 스무 살의 앙리 뒤낭Jean Henri Dunant (1828-1910)이 그의 사명을 받았던 곳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곳에서 신의 사명을 받고 적십자를 창립하게 된다.
결정적으로 그가 적십자를 세우게 된 계기는 이탈리아의 전쟁터에서였다. 그는 전쟁 중인 지역을 지나가며 수많은 군인이 너무나 허무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보았다. 당시 전쟁터에서 다친 군인들은 그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그는 아군이나 적군이나 다친 군인들이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장치를 즉석에서 구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당시 경험을 자세하게 기록해 책으로 출간했다 — <솔페리노의 회상>Un souvenir de Solférino (1862). 당시 이 책은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고 결과적으로 제네바 협정Geneva Convention을 이뤄냈다. 제네바 협정은 1864년 12개의 국가가 10개 조항에 합의하면서 첫 협정이 맺어졌다. 이 협정은 적십자 설립에 기초가 되는데, 1867년 말, 21개 국가가 이 협정에 서명했다.
이후 뒤낭은 파리로 가서 계속해서 구호 활동과 사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사업은 번번히 실패하게 되고 그는 가난에 시달리게 된다. 여러 도시들을 전전긍긍하던 그는 1887년 여름 스위스로 돌아온다. 스위스 산속 아펜젤 아우세르호덴Appenzell Ausserrhoden 칸톤의 하이든Heiden에 도착한 그는 늙고 병들어 초라한 모습이었다. 엄청난 업적과 위대한 헌신에도 불구하고 뒤낭은 누구의 관심도, 보상도 받지 못한 채 홀로 쓸쓸이 죽어가고 있었다. 물론 그는 명예도 부도 바라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사명감 하나로 헌신의 길을 걸었을 뿐이다.
그렇게 세상에 잊혀진 존재가 되었을 무렵 하이든을 여행하던 한 기자가 우연히 앙리 뒤낭이 그 지역에서 지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기자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뒤낭과 인터뷰를 하고 기사를 내보낸다. 그제야 세상은 뒤낭의 소식에 집중하게 되는데, 이는 그가 1901년 프랑스의 경제학자 프레데리크 파시Frederic Passy (1822-1912)와 공동으로 첫 노벨평화상을 받게 했다.
뒤낭은 마지막까지 나누는 삶을 살았다. 상과 함께 받은 상금을 자신을 돌봐주는 분들과 병원에 가난한 이들을 위한 기금으로 남겼다. 그리고 뒤낭의 신념과 가치를 이어받아 적십자는 여전히 쉬지 않고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