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재이 Apr 05. 2024

풍경을 보내주는 일에 관하여

24.04.02. 화요일


 이사갈 짐을 싸러 대구에 와 있다. 짐을 싸면서 책도 볼 검 2주쯤 시간을 두고 지내기로 했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바쁘게 집 청소도하고 이것저것 옮기느라 분주했다. 내가 살던 집에는 나를 닮은 것이 많았다. 낡은 전자피아노, 여기저기 헤진 소파,다 떨어진 의자 같은 것들. 몇몇은 버리고 가야해서 마음이 쓰인다. 


 이삿짐 센터에 전화를 했더니 책은 모두 그대로 두라고 해서 정리해야할 게 줄었다. 덕분에 더 느긋하게 쉴 수 있게 되었다. 원룸치고는 꽤 큰 편인 집을 눈으로 둘러보니 여기 처음 왔을 때 집을 꾸미기 시작했을 시간이 떠오른다. 그 때는 혼자만의 공간을 갖게 되어서 무척 기뻐했다. 조용한 집도 마음에 들었고 근처에 역이 있는 것도 좋았다. 그리고 피아노와 소파가 들어올 수 있는 넉넉한 방도 좋아했다. 지낼만하게 집을 꾸미고 나니 여름이었고, 그 해 여름에는 몸살을 심하게 앓았다. 더위를 먹었는지 이삿짐을 풀고 짐을 꾸미느라 고생을 했는지 온몸이 아파서 거의 한달쯤 누워서 지냈다. 


 이 작은 집에서의 추억이라면 손목 건초염을 앓았을 때의 기억이 있겠다. 왼손 건초염으로 악기를 몇달간 손에 붕대를 감고 연습했는데 집에 와서 피아노 연습하는 도중에 오른손에도 통증이 있어 병원에 가보니 오른손도 인대에 염증이 있다고 했다. 절망해서는 연습실에 한참 동안 앉아있다오곤 했는데, 통증이 반깁스를 해야할 정도로 심해서 집에서 꼼짝않고 박혀 있었다. 늘 집에서 잠만 자고 누워있으니 낮밤이 바뀌어 새벽에 깨곤 했는데, 그러면 나는 그 새벽에 그나마 덜 아픈 왼손으로 피아노를 치곤 했다. 그러면 멜로디만 들리는 피아노 소리가 이어폰을 낀 귀로 흘러들어오는 것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몸살을 앓고 있는 내 위로 내려앉던 어둠을 기억한다. 저 멀리 비치던 랜턴 조명도, 낡은 집의 냄새도, 어김없이 들려오던 냉장고 소리도 여전히 내 귀에 들리는 듯 떠올릴 수 있다. 작고 아늑한 방은 지친 나를 가득 감싸주었다. 그리고 이제 이 집에서 떠나야 할 때가 왔다. 


 다시 시작하는 일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기분 좋은 말을 쓰겠지만 이 곳을 떠나는 일에 관해서는 머리 속에 단어가 너무 많이 들어있어 쉽게 쓰지는 못하겠다. 단어들을 나열해보자면 슬픔, 그리움, 버팀, 내려앉음, 쓸쓸함, 그리고 사랑했음 따위가 있을까. 


 처음 이사와 전기가 나갔을 때의 밤이든, 여기저기 퉁퉁 부은 몸으로 겨우 일어나 피아노를 치던 새벽이든, 그리고 악기를 그만두겠다며 공부할 책을 들고 멍하게 앉아 울어버렸던 저녁이든 나는 이 집에서 어떤 상태이든 아주 철저히 느끼고 살아있었다. 온통 고스란히 느껴지던 감촉을, 촉감을 기억한다. 그리고 그 몸짓들은 여기 조그만 집에서 이루어졌다. 이 곳을 쉽게 떠나보내고 싶지 않다. 


 느리게 짐을 싸면서 집을 보내려고 하는데, 쉽게 보내지지가 않는다. 다음주 이사인데 나는 짐은 쌀 생각도 없이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책만 보고 있다. 언제든 기억할 수 있는 순간이 꽤 많아 위안이 된다. 그리고 내 공간을 잃어버리는 아쉬움보다는 이제 새로 살아갈 곳에 대한 기대감도 가질 수 있겠지. 아파하고, 쉬고, 그리고 사랑했던 곳은 내게 아주 큰 그리움을 남길 것이다. 이 곳에서 살아갔던 기억 때문이겠지. 여기 이 공간이 나의 기억을 모두 담아 보여주고 있다. 패기 좋게 새로운 방으로 가서 활기차게 지내면 다행이겠지만, 나는 이곳을 떠나기 전부터 이 곳에 대한 향수를 걱정한다. 내가 이 곳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이 곳에서 지낸 생활이 내게 간절했기 때문이었을 거다. 자주 아팠다. 그리고 하고 싶은 일이 많았고, 아픈 몸은 쉽게 낫지 않았고. 그리고 사랑하는 것들이 가득했다. 예를 들면 가득 쌓여있는 악보나 포근한 소파, 혹은 철학책 같은 것.


 그래서 지금은 마지막까지 마음을 다해서 살고 이 기억을 보내주자는 자세로 짐을 싸고 있다. 사두고 입지 않은 옷이 많아 옷을 고르고 골라도 끝이 없다. 악보는 쌓여서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피아노 악보인지 대금 악보인지도 모르겠다. 글은 이렇게 간절하고 아프게 써놨다만 정리를 하려하니 머리가 복잡하다. 여기까지가 이 곳이 남겨주는 기억일 것이다. 끝날 때까지는 소중히 가득 안고있다 보내주어야 할 때는 마음을 다해 보내줄 것. 소중하게 남은 기억은 어느새 내가 되어 계속해서 있을 세상을 살아낼 것이다. 그렇게 모두가 살아가는 거겠지. 대구에는 꽃이 가득 피었다. 거리 한 켠에 하얀 벚나무가 팔랑팔랑 손을 흔들어 주는 것만 같다. 

이전 01화 아름다운 지난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