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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이 Apr 05. 2024

우연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24.04.03. 수요일

 <활자 안에서 유영하기>라는 책을 읽고 있다. 네 권의 소설책을 소개하고 읽어나가며 작가의 해설과 후기를 덧붙여 이야기하는 책인데 잠깐 대구에 혼자 있으면서 조금씩 읽고 있다. 


 첫번째 소설인 임레 케르테스의 <운명>을 이야기하는 부분을 가장 인상깊게 읽었다. 책에서는 나치 시대의 상황을 설명하면서 그 상황을 살아낸 소년의 이야기인 <운명>에 관해 이야기한다. 필자는 어린 소년의 담담한 묘사가 작가 임레 케르테스의 관점을 잘 드러내 보이고 있다는 포인트를 짚으면서 이렇게 말한다. "납득되지 않은 경험을 한 사람은 그 경험이 못내 시간에 버티지 못하고 흐려질 때까지 그 속에서 살도록 내던져진다. 이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이미 시간은 그에게 멈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시간으로부터 탈출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 작가는 말한다. 


 살아내는 순간 머리 속에 박제될만큼 괴로운 순간과 버티지 못할 만큼 강렬한 순간은 분명히 존재한다. 나에게도 그런 기억이 여러 개 있다. 그렇게 벗어나지 못하는 순간을 살아내면서 함께 했던 것은 그 기억과 함께 오랫동안 와닿는다. 


 학교 저녁 연습에 가면서 올려다보았던 흐린 하늘이나, 닳도록 들었던 음악이나, 읽은 다음 끌어안고 울어버렸던 문장 같은 것들. 그런 것들은 오랫동안 괴로움과 함께 내 안에 남아있다. 아니, 오랫동안 나는 그것을 몇번이고 그 순간과 함께 기억한다. <운명>에 관한 이야기는 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인용하며 선과 악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그것이 이루어지는 일에 관해 말하며 끝난다. 결국 우리는 그것들에 관해 마음을 다해 고민하고 끝없이 생각해야한다고 말하며 한 챕터가 마무리된다. 선과 악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는 양심도 의미를 잃는다. 누군가의 한끗 차이로, 아주 의미없는 일로도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일어나는 일 같은 괴롭고 부도덕한 일은 벌어질 수 있다. 그러나 그 곳을 살아냈던 소년은 이렇게 말한다. 잊어야하거나 지나가야 할 과거란 없고 우리는 계속 순간순간을 살아나갈 뿐이라고. 소년의 이야기를 따라 가다보면 수용소의 일상적인 장면을 함께 본다. 열린 기차 창문으로 들어오던 햇살, 샤워실의 냄새, 늘 부족했으나 기뻐하며 받을 때도 있던 급식, 그리고 머물던 병실의 사람들. 


 사람들이 행한 악한 일로 벌어진 곳에서도 삶은 있었다. 소년의 이야기가 그 증거다. 임레 케르테스가 쓰고 싶었던 것은 그런 것이 아닐까. 소년은 그런 곳에서도 스스로 단정한 태도로 걸어왔음을 자신한다. 삶은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걸어가는 것이다. 엠레 케르테스의 자전적 소설인 <운명>은 그렇게 끝난다. 수용소에서 나온 뒤에도 임레 케르테스는 여전히 그 기억으로 고통 받는다. 그 기억은 쉽게 흐려지지 않고, 그를 고통 속에서 살도록 내던져 둔다. 그러나 그는 살아간다. 그는 존재한다. 박제될만큼 괴로운 기억은 있다. 납득되지 않은 경험을 한 사람의 시간은 멈춘다. 그러나 그는 이 세계에 살아있다. 살아간다. 그래서 우리는 그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한다. 세상이 누구에게 함부로 부당한 일을 겪게 할 권리는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한순간 살아갈 때마다 무엇이 옳은 일인지 분투해야한다. 그것이 옳다. 소중히 대하지 않을 삶은 없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에게 영향을 줄 수 밖에 없다. 그렇기에 한 자리에 서는 한 바른 곳을 향해야한다. 그렇게 살아야 한다. 


 고통 속에서도 남은 나의 일상을 기억한다. 겨울 하늘이나 외워버린 노래 가사 같은 것들. 그것이 이 세계에 더 살아가도 괜찮다는 증거는 아닐까. 늦겨울 하늘이 유난히 부드럽게 보일 때도 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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