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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파물꼬기 Sep 14. 2023

버려진 화분

몬스테라를 사랑한 안시

지난해 비가 오던 어느 밤이었다.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러 아파트 1층 분리수거장에 갔다.  쓰레기를 버리고 돌아오려고 하는데 오른편 구석에 화분 하나가 있었다. 


화분은 반쯤 깨져 있었다. 깨진 틈 사이로 검은흙과 모래가 흘러내렸고 식물 뿌리가 공중에 노출되어 있었다. 잎사귀는 바람 빠진 풍선처럼 쭉 늘어져 있었다.  


이대로 두면 죽을 텐데. 망설였다. 한참을 망설였다. 이미 집에는 이렇게 나에게 온 화분들이 많아 더 이상 놓아둘 공간이 없었다.   


딸아이가 거실에 들어오는 나를 봤다. 

" 아빠! 그게 뭐야? 어 화분이네! 깨졌어? 애가 아파 보이는데? "

" 응 아빠가 살려주고 싶어서 데려왔어. 밖에서 덜덜 떨고 있더라고. 누가 버렸나 봐. 나쁜 사람들... 아빠 잘했지? "

" 응 아빠 식물이 고마워할 거야. ^^ "


역시 우리 딸이라는 생각과 동시에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나는 사막에서 물 없이도 수개월을 산다는 산세베리아도 단방에 저승으로 보내는 그런 능력의 소유자였다.  


"살리지 못하면 어떡하지? 내가 이 친구의 인생에 괜히 간섭하는 게 아닐까? 그냥 두고 올 걸 그랬나." 

자꾸 불안한 마음이 엄습했다. 


어쩌다가 차가운 쓰레기장 옆에 처박혀 있는 신세가 되었을까?  무슨 기나긴 사연이 있었을까?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 살짝 보듬어주니 찢긴 잎사귀 사이로 눈물이 흐르는 것만 같았다. 어? 그런데 갑자기 잎사귀가 살며시 살랑거렸다. 내 체온이 좋은가?


어떤 식물인지 몰라 핸드폰으로 검색해 보니 '몬스테라'라는 식물이었다. 연초록의 찢어진 커다란 잎과 시원시원한 줄기가  멋스러워 유럽풍의 고급 거실에 잘 울리는 친구였다.  그래 우리 집에 잘 어울리겠어.


이제 나는 어떻게든 살려야 했다. 그래서 연구했다. 엔지니어답게 철저하게... 1번은 흙 화분,  2번은 어항 물 2가지 대조군을 만들어 살 수 있는 확률을 높이기로 했다.  


비장한 마음으로 수술을 집도했다.  소독한 칼로 조심스럽게 생장점을 잘랐다.  아프다고 소리쳤지만 조금만 참으라고 말했다. 5분 만에 끝났다.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계획대로 1번은 흙에,  2번은 어항에 넣었다. 


1개월이 흐른 후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어항 속에 넣은 2번 몬스테라가 새 잎까지 내어주며 강력하게 살아났다. 잎은 여린 연녹색의 작은 아기 손바닥 같았다.  처음에 돌돌 말려 있다가 점점 잎을 펴면서 새초롬하게 나왔다. 


이 광경을 보고 있는 나를  물고기들이 질투할 정도로 나는 넋이 나갔다.  대성공이었다. 반면에  흙 화분에 심은 친구들은 작고 힘이 없었다. 


어항 속에 넣은 2번 몬스테라가 놀라운 성장을 한 이유는 물고기가 배출한 '똥'의 영양소와 어항에 설치된 조명의 빛 때문이었다.  


더 놀라운 점은  몬스테라의 잔뿌리가 물고기 똥의 독소를  빨아들여 깨끗한 수질을 만들어줬다는 점이다. 

어쩐지 아침마다 안시 엄마가 나에게 '윙크'를 날렸던 일이 백퍼 이해되었다.


매일 새벽 나는 일어나자마자 물고기들과 몬스테라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시도 때도 없이 몬스테라 뿌리에 부드럽게 키스하는 물고기는 진정한 사랑꾼이었고 다소곳하게 뿌리를 내어주는 몬스테라는 새색시처럼 청아했다. 


나는 오늘도 다정한 사람이 되기 위해 사소한 무언가를 두리번 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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