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그저 사랑받고 싶었을 뿐인데
나의 스물두 번째 생일에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부모님과 1년 만에 엄마의 집밥으로 함께 식사를 했다. 그동안 사실상 치료한다며 소고기, 닭고기 등
고기를 먹기 시작하고 많은 종류의 음식을 도전했지만 왠지 엄마가 해주는 음식은 먹기가 힘들었다.
그중에서도 밥이 가장 무서웠다.
엄마는 내게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밥을 먹이겠다는 마음 하나로 커다란 새 압력밥솥과 예쁜 새 식기들을 마련하고 온갖 몸에 좋은 재료들을 분주히 준비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엄마의 정성스러운 집밥을 마주한 나는
아기가 이유식을 마치고 처음 밥을 먹기 시작할 때와 같은 마음이었다. 낯설고 두렵고 무서웠다.
사실 며칠 전부터 밥을 먹어야 한다는 불안감과
살이 찔 것만 같은 두려움, 강박이 나를 짓눌러
한시도 편하지 못하고 예민했다.
하지만 엄마의 집밥은 눈물 나게 맛있었다.
부모님과 40분 동안 함께 한 식사는 남다른 행복을 주었다. 비록 밥의 양은 어른 수저로 한 숟가락일만큼 너무 부족하고, 간도 제대로 되지 않은 음식이었지만 내게는 벅차고 그 무엇보다 값진 식사였다.
마침내 첫 식사를 마치고 비건 베이커리에서 사 온 조각 케이크를 꺼냈다.
현미로 만들어 평소 먹어보고 싶었던 케이크였기에 오전 내내 부모님과 먼 길을 다녀왔다. 설렘도 잠시 그 순간 작은 케이크가 밥보다 무서워졌다.
한 입을 먹으면 금세 다 먹어치워 낼 것만 같았다.
결코 멈출 수 없는 식욕을 불러일으킬 위험 음식,
마치 적과 같이 느껴졌다. 왠지 그럴 것 같았다.
먹음직스러운 케이크를 앞에 두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내게 엄마와 아빠는 곁에 함께 있어주셨다.
나는 조심스레 포크를 들어 현미케이크를 한 스푼 떠 천천히 입에 넣었다.
입속에서 강렬하게 퍼지는 천연 메이플시럽의 단맛이 미각을 깨우며 급작스럽게 두려움이 온몸으로 퍼졌다. 그렇지만 정말 믿을 수 없이 맛있었다.
사실 오늘은 현미케이크 한 조각을 부모님과 천천히 나눠먹는 게 목표였다. 그조차 강박이었다.
그런데 한 조각을 부모님과 함께 나눠먹고 나니
갑자기 남아있는 두 조각의 케이크가 너무나도 무서웠다. 오늘을 넘기기 전에 내가 모두 먹어버리고 말 것 같은 극강의 두려움이었다.
결국 아빠께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남은 케이크를 모두 먹어달라 부탁했다. 방으로 케이크를 들고 가는 아빠를 보며 엄마와 함께 거실에서 내내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
먹고 싶은데 먹지 못하는, 결국에는 또 절제하고 강박에 지고만 스스로에게 화가 나고 또 안쓰러웠다.
계속해서 먹지 못한 두 조각의 케이크가 떠올랐다. 머릿속에서 영영 사라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엄마는 내게 한 입씩이라도 먹어볼 것을 권유했다.
'그래, 결심했어! 한 입이라도 먹어보는 거야.
그래야 후회하지 않을 수 있어. 너무나 간절하잖아..'
엄마는 나의 결심을 듣자마자 아빠에게 "멈추세요!"라고 외치며 아빠가 계신 방으로 들어가 내가 맛볼 소량의 케이크를 종류별로 덜어다 주셨다.
나는 덜어온 케이크를 받아 들고 맛을 음미했다.
전에 먹은 현미케이크보다 오히려 덜 달고 더 맛있었다. 먹지 않았다면 무척이나 아쉬웠을,
아니, 평생을 또다시 후회하며 먹고 싶어 했을 황홀한 맛이었다.
그것은 내게 결코 한입의 케이크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다. 그 이상의 용기였고, 충분한 만족이었다.
후식까지 긴 식사를 마친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지쳐있었지만 벅찬 행복과 뿌듯함으로 가득했다.
오후에는 엄마 아빠와 생일 나들이로 집 근처
롤러스케이트장으로 향했다.
늘 엄마 아빠와 다정하게 양쪽 손을 붙잡고
놀이공원이나 동물원을 가보는 게 소원이었다.
오랜 꿈이었달까.
언니가 아닌 나에게만 온전히 신경을 써주는 모습, 따뜻한 손길, 한결같은 시선들을 늘 바라왔다.
한쪽에서 해맑게 회전목마를 타는 어린 나를 온종일 눈으로 좇으며 반갑게 손 흔들어주는 아빠와 엄마.
그저 행복한 미소로 즐겁게 놀이기구를 타며
그런 부모님을 열심히 눈으로 찾는 나.
나만의 상상 속 그림이었다.
그저 상상뿐인 헛된 희망이자 환상이라 생각했다.
좁은 방 한구석에서 홀로 바라고 그리며
울다 잠드는 밤. 실은 그런 게 나의 현실이었다.
놀이공원이나 동물원은 아니지만 꼭 한 번 가고 싶었던 롤러스케이트장에 엄마 아빠와 함께였다.
드디어 나만의 오랜 상상이 눈앞에 펼쳐진 것이다. 마치 신기루인 듯 믿기지 않았다.
거식증으로 심장이 쪼그라들어 온몸이 병들어가고 나를 말라가게 하니 펼쳐진 천국일까.
내가 스스로에게 준 벌이 엄마와 아빠를 변화시킨 걸까, 생각했다.
그 사실이 너무나 서글프면서도 한편으로 원망스러움에 화가 났다. 왜 이제야..
왜 이렇게 망가뜨린 후에야 그들은 내가 고통받았다는 걸 뒤늦게 알아챈 걸까.
온몸의 뼈가 훤히 드러나 여름에도 긴 옷으로 마른 몸을 감추고, 혼자 제대로 서서 롤러스케이트를 타지도 못할 만큼 망가진 나를 마주하고서야 깨달은 걸까, 참을 수 없이 슬펐다.
살이 찌고 건강해지면 지금의 행복이 사라질까 봐 두려웠다. 이토록 낯선 부모의 무조건적인 사랑이,
이 관심과 걱정 어린 눈빛이 모두 한순간에 끝나버릴 것만 같았다. 또다시 어린 날의 무관심 속에 버려졌던 뚱뚱하고 못난, 그저 먹을 것과 드라마에 위로받던 나로 돌아갈 것만 같아 너무나도 무서웠다.
살이 쪄야 살 수 있는데,
20킬로 대는 정말 바로 눈앞이 죽음인데,
그보다 예전의 나로 돌아가는 게 더 싫고 겁이 났다.
더 이상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참기 싫었다.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어른스럽고 착한 딸이기 싫었다.
그럴수록 살이 찌는 게 죽기보다 두려웠다.
더는 혼자 숨어서 울며 외롭고 싶지 않았다.
언니가 영영 돌아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내가 나아지지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엄마 아빠가 변하지 않고 나만 바라봐 주기를,
다시는 혼자 두지 말아 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생일선물로 받은 자전거를 가지고는 난생처음 한강나들이를 나갔다. 차근차근 하나씩 그동안 하지 못했던 것들을 부모님과 함께 경험하기로 약속했다.
마치 엄마 아빠와 어린아이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한강에 돗자리를 펴고 아빠가 끓여 온 라면을 함께 먹었다. 비록 한 젓가락이었지만 내가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며 부모님도 함께 웃으셨다.
엄마의 무릎에 잠시 누워있다
한강을 따라 새로 산 자전거를 타보기로 했다.
속도를 올리는 나의 뒤로 조심하라 외치는 부모님의 당부가 들려왔다. 조금만 움직여도 심장이 아프고 숨이 차는 내게 자전거는 아직 무리였다.
그러나 앙상한 두 다리로
열심히 페달을 밟으며 생각했다.
'계속 사랑받고 싶어.
그러니 절대 나아지지 않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