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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아 Feb 15. 2023

여기, 진상 환자 한 명 추가요!

12. 먹고 싶지만 먹고 싶지 않아

벌써 병원에 다닌 지 두 달째였다.

동시에 서울백병원 섭식장애 클리닉인 모즐리 회복센터에서 상담치료를 병행했다.

그사이 중국에 어학연수를 떠났다가 여름방학을 맞아 집으로 돌아온 언니를 피해 병원 근처 명동의

작은 호텔에 단기 렌트 후 거주하며 내원했다.

무작정 집을 떠나온 건 처음이었다.

여전히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다.


하루의 유일한 식사인 고구마 한 개를 먹고 있던 저녁이었다. 이사를 가는 집마다 가장 큰 안방은 늘 언니의 차치였다. 안방에서 언니와 엄마의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왔다.

언니의 울음소리가 거세졌고 나는 이내 한입 베어 문 고구마를 내려놓았다.

수면제를 찾느라 엄마와 실랑이하던 언니가 어느새 문 앞으로 온 나를 발견하곤 소리쳤다.

"엄마는 쟤만 걱정하잖아.

먹고 죽어버리게 수면제 내놓으라고!"


병원에서 언제라도 심장이 멈출 수 있다는 말을 들은 지 며칠 되지 않은 날이었다.

나뭇잎 하나 남지 않은 말라비틀어진 고목처럼 서있는 내게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언니가 내 탓을 했다.

몸 안에 지방이 단 1kg도 남지 않을 때까지 나를 괴롭히면서 언니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슴이 터질 것처럼 화가 나고 미치게 억울했다.

더는 가족이라는 이름아래 한시도 함께하기 싫었다.

다음 날 아침, 곧바로 짐을 싸 고시원으로 향했다.




병원 근처로 함께 고시원 방을 보러 온 부모님은

창문 하나 없이 작고 어두운 방을 보자마자 내게 호텔 단기렌트를 하자고 설득하셨다.

집에서 언니와 지낸 일주일 동안 33킬로에서

31킬로로 또다시 체중이 내려간 상태였다.

언제 쓰러질지 모르는 나의 보호자로 엄마가 함께 호텔에서 지내기로 했다.

당시 엄마는 내가 화장실에서 씻는 동안에도 물소리가 줄어들면 몇 번이고 나의 이름을 부르며 생사를 확인하고 있었다.


그해 여름, 나는 원룸과도 같은 작은 호텔에 스스로를 가두고 절제형 거식증이라는 병명 아래

그토록 받고 싶었던 엄마의 관심과 사랑을 독차지하며 더욱더 마른 몸에 집착했다.




병원 치료를 시작하고 먹는 양만 조금 늘어났을 뿐 사실 나아진 건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몸무게는 더 하락하고 상태가 더 나빠지고 있었다.

병원에 갈 때마다 처방받는 약과 엔커버액의 양은

늘어났지만 그 어느 것도 제대로 먹지 않았다.


상담실에서는 매번 몸무게를 확인하고,

하루하루 작성 한 식사일기를 검사한 뒤 먹는 양을 늘리기 위한 실랑이 같은 협상을 반복했다.

그때마다 나는 약간의 거짓을 보태 양을 늘리기로 약속하고, 돌아와서는 칼로리를 더욱 제한하여 체중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운동을 멈추라는 지시에도 만보를 채우기 위해 온종일 걷고 또 걸었다. 사람들로 붐비는 명동 거리를 걸을 때면 가판대 속 맛있는 음식들을 보며 수백 번의 절망을 경험했다.

매 순간 미칠듯한 공복감을 느꼈지만 결국 절제와 강박, 거식이라는 병은 나를 서서히 마비시켰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음식으로 겪는 고통이

이리도 거대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호텔에서는 거의 매일같이 엄마에게 울음과 분노를 쏟아냈고, 그때마다 심장은 금방이라도 멈출 듯 고통스러운 신호를 보내왔다.

내가 나 자신이 아닌, 거식이란 괴물에 온 정신을 빼앗길 때면 항상 어린 시절 상처받은 나의 이면으로 파고드는 기분이었다. 어쩌면 굶을수록 내 안의 아이는 더욱 몸짓을 부풀렸을지 모른다.

어둠은 그 자리에서 몸을 숨길 뿐 결코 사라지지 않고 더 깊숙이 숨어 내 안으로 파고들었다.

단지 뒤늦게 발현한 것일 뿐, 언젠가 수면 위로 드러날 것이었다. 모든 게 두려웠다.

나도 나를 그만 놓아버리고 싶었다.




끝내 미루고 미뤘던 휴학신청을 했다.

곧 방학이 끝난 언니는 가을 학기를 위해 다시 중국으로 돌아갈 것이었다.

언니가 떠나면 엄마와 다시 집으로 들어가 치료를 병행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단호박, 방울토마토 따위로 식사를 대신했던 호텔에서의 식단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면

내 생일을 기점으로 엄마가 해주는 집밥을 먹어보기로 약속했다.

오지 않을 것만 같던 약속의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처음으로 용기를 내어 회복센터에서 식사 집중치료를 했다. 거의 일 년 만에 먹은 밥이었다.

먹기도 전에 눈물이 터졌다.

식판에 담긴 반찬과 밥은 터무니없이 적고, 즉석밥에 보잘것없는 것들이었다. 그래도 두려움을 떨치고 조금씩 음미하며 먹으니 눈물 나게 맛있었다.


비록 살이 찌면 사랑받지 못할 거라는 강박과

멈추지 못할 것만 같은 음식에 대한 강한 욕구를 억누르고자 하는 마음을 아직 떨치지 못한 채였다.

삼분의 일이 채 되지 못하는 양이지만 한 시간에 걸쳐 더디게 아주 천천히 먹어냈다.

입안의 낯선 감각을 느끼며 이렇게 하나씩 나아가는 거라고 속으로 되뇌었다.

'이게 이런 맛이었네. 맞아, 두부는 이런 맛이었지. 김치는 이런 맛이었어.'

 



호텔에서의 마지막 밤이었다.

침대에 누워 엄마의 가슴팍에 파고들어 숨을 들이켰다. 내 등을 쓰다듬는 엄마의 손길이 조심스러웠다.

엄마의 숨결이 좋으면서도 이내 심장은 답답함을 호소했다. 순간, 느리게 뛰는 심장이 무서우면서도 내심 고마웠다.

엄마가 옷 위로 드러난 내 앙상한 날개뼈를 내려다보며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나는 끝내 갑갑함을 참지 못하고 등을 돌려 누웠다.

작은 심장에서 최대한 큰 숨을 뱉어냈다.

"심장이 아프니?"

엄마가 물었다.

'응', 사실은 이렇게 대답하고 싶었다.

"아니"

 

여전히 벼랑 끝에 선 기분으로 옴짝달싹 못한 채

그저 하나 남은 앙상한 나뭇가지로서 낮은 체중이라도 붙들려 발악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지만,

내일 집에 돌아가면 다시 제대로 치료에 임해보기로 다짐했다.

20kg 대는 정말 위험하다는 사실을 나도 잘 알고 있었다.   




먹은 것보다 늘 조금씩 양을 늘려 적곤 했던 식사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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