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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 요정의 출현

요정이 된 발레리나들

by 아트 서연

클래식과는 달리 낭만주의가 먼저 시작된 발레

애초에 발레는 귀족들의 사교댄스였기 때문에 부담스러운 가발과 가면을 쓰고 치렁치렁한 옷을 입고 굽이 높은 구두를 신고서 자기 과시하듯이 무대 위를 멋들어지게 걷기만 하면 되었다. 하지만 전문 무용수들을 양성하기 위한 왕립무용아카데미가 설립되면서 발레 마스터들은 체계적인 무용 교육을 위한 교본을 만들었다.


먼저 악보에 음표들을 기보하듯이 발레 테크닉과 무용의 동작들을 기보하기 시작했다.(무용보) 무용보에 안무들을 기보하면서부터 무용 이론도 정립할 수 있었기 때문에 점점 현란한 테크닉을 시도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변화는 남성 무용수들에게서 먼저 시작되었다. 18세기 발레는 확실히 남성 중심이었다.


하지만 어느 시대에나 다르게 생각하는 인물이 항상 있는 법. 18세기에 이미 다르게 생각했던 발레리나가 있었으니 바로 용기있는 발레리나 카마르고였다. 이미 뛰어난 테크닉을 갖추고 있었던 카마르고는 거추장스러운 스커트가 춤추는 것에 발목을 잡는다고 생각해 아예 스커트를 댕강 도려내어 발목을 드러내버렸다. 그 뒤 그녀는 부도덕한 여인이 아니라 오히려 인기가 높아졌고 그녀의 용기 있는 선택 덕분에 여성 무용수들을 짓눌렀던 스커트의 길이는 점점 더 짧아져갔다.


급기야 여성 무용수들의 스커트는 무릎에서 약간 내려오는 길이까지 짧아지면서 종모양의 스커트인 로맨틱 튀튀가 만들어졌다. 여기에 19세기의 스타 발레리나 마리 탈리오니가 등장하면서 발레의 판도를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스타 발레리나 탈리오니가 날개 달린 로맨틱 튀튀에 토슈즈를 신고 무대 위에 오른 순간 발레의 역사는 남성 중심에서 여인 천하로 바뀌었다.


희부연 가스등의 조명 아래에서 날개 달린 종모양의 스커트를 입고 발끝으로 무대 위를 동동동 가볍게 떠다니는 그녀의 모습에 당시 파리 시민들은 넋을 잃었다. 그녀의 청순한 이미지와 러블리한 발레 테크닉은 유럽 전역에 센세이션을 일으키면서 이미 유럽을 휩쓸고 있었던 예술사조인 낭만주의가 발레에서도 시작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낭만발레의 요정들 : 마리 탈리오니, 카를로타 그리시, 파니 세리토, 루실드 그랑



이미 전문 무용수들의 영역으로 진화한 발레는 더 이상 귀족들의 것만이 아닌 서민들도 누릴 수 있도록 대중화어 있었다. 당시 대중들은 먹고 살기 팍팍한 현실로부터 도피하고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자연스레 초자연에 관심을 가졌으며 초자연적인 요정들이나 정령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발레를 관람하기 위해 극장을 찾았다.

낭만 발레 <라 실피드>의 삽화


발레에 공기 요정이 출연하면서부터 더 이상 발레는 기교에만 갇히지 않았다.


나름대로 스토리를 갖추려고 했으며 극의 전개에 따라 인물들의 감정도 극적으로 표현하려고 했다. 다리가 비치는 로맨틱 튀튀를 입고서 금방이라도 하늘로 승천하려는 듯이 아라베스크 자세를 했으며


이루어지지 않은 슬픈 사랑을 고이 간직한 내면 연기를 선보이면서 팡쉐 동작을 했다.


햐얀색 로맨틱 튀튀를 입고 군무를 추는 백색 발레가 시작되었으며


남녀 주역 무용수의 2인무도 만들어졌다.


토슈즈를 신고서 인간이 아닌 요정처럼 보이기 위해 브레브레 동작으로 무대 위를 가볍게 떠다니며 움직이는 온갖 푸앵트 기법도 구사했다.


낭만주의 발레의 대표작품 <라 실피드>

초연 안무 : 필리포 탈리오니(마리 탈리오니의 아버지)

음악 : J. 슈나이트후퍼

초연 : 1832년 파리 오페라 극장

<라 실피드>에서 마리 탈리오니


부르농빌의 <라 실피드>

덴마크 발레의 아버지 오귀스트 부르농빌은 탈리오니의 <라 실피드>를 보고 감동을 받았다. 그러나 부르농빌은 1836년 덴마크 왕실에서 <라 실피드> 공연을 했을 때에는 탈리오니의 버전을 그대로 사용하지 않았다. 부르농빌은 다른 음악을 사용하여 부르농빌 메소드(덴마크 발레 교육법)로 바꾸어 재안무한 것을 사용했고 이 버전은 소실되지 않은 덕분에 전 세계 다른 발레단들도 참고하면서 현재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배경 : 스코틀랜드의 한 농촌 마을

등장 인물 : 실피드(요정), 제임스(마을 청년), 에피(제임스 약혼녀), 마지(숲속의 마녀), 구른(에피를 짝사랑하는 청년)

줄거리 : 부르농빌은 낭만과 환상만을 쫓던 탈리오니 버전의 <라 실피드>의 결말을 바꿔 교훈을 남겼다. 결혼식을 앞둔 청년 제임스가 공기 요정 실피드에게 반하면서 잡힐 듯 말듯한 사랑도 이루지 못하고 현실에서의 약혼녀도 다른 남자(구른)한테 빼앗기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https://naver.me/x95us4Qb



낭만주의 발레 그 후

까치발의 묘기를 시작했던 낭만주의 발레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별다른 상상력이 없이 매번 비슷한 주제들을 작품으로 한 낭만주의 발레에 대중들은 이내 식상해했다. 프랑스에서 낭만주의 발레가 쇠퇴하면서 대중들로부터 발레에 대한 관심이 멀어져갔다. 이때다 싶었던 러시아는 유럽의 발레 인사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중에는 프랑스 출신의 발레리노이자 안무가였던 마리우스 프티파도 있었다. 이로써 발레의 패권은 프랑스에서 러시아로 넘어갔다. 마리우스 프티파는 러시아 황실의 지지와 후원을 받으면서 클래식 발레의 형식을 완성시켰다.


마리우스 프티파는 차이코프스키와 밍쿠스, 드리고, 글라주노프와 같은 걸출한 작곡가들과 협업을 하면서 고전주의 발레를 완성시켰다. 음악에 대한 재능까지 뛰어났던 프티파는 작곡가에게 너무 많은 요구와 간섭을 해서 차이코프스키가 짜증을 냈다는 일화도 유명하다. 어쨌든 프티파와 차이코프스키 두 천재의 만남은 무용사에서도 음악사에서도 길이 남을 업적을 남겼다.




스토리가 없는 20세기 낭만주의 발레의 걸작 출현


미하일 포킨의 <레 실피드, Les Sylphides>

안무 : 미하일 포킨

음악 : 프레데릭 쇼팽

편곡 : 쇼팽의 피아노곡들을 관현악곡으로 편곡한 알렉산드르 글라주노프 <쇼피니아나>

출연 : 발레 뤼스

러시아 초연 : 1907년 2월 23일 마린스키 극장 (첫번째 안무), 러시아에서는 이 작품을 <소피니아나>로 부름

파리 초연 : 1909년 6월 (두번째 안무), 파리 초연을 앞두고 작품 이름을 <레 실피드>로 개명


새로운 것을 갈망하는 러시아 발레 엘리트 중에 미하일 포킨도 있었다. 그는 황실학교에서 엄격한 발레 교육을 받았음에도 프티파식의 발레인습을 타파하고 싶어했다. 특히 1904~1905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방문한 이사도라 덩컨의 자유로운 춤을 접하고부터 그의 도전정신은 더욱 강해졌다.


그렇다고 해서 발레에 관한 모든 것을 거부하는 이사도라 덩컨의 생각에 모두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사실 그녀의 움직임에는 특별히 정교하거나 세련된 면이 없었고, 이는 결국 그녀의 표현력을 제약했다."

- <댜길레프의 제국> p. 80 -

어쨌든 포킨은 아카데믹한 발레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발레의 아카데미즘을 다 버리지는 않으면서 덩컨의 자유로움과 발레의 아름다움을 살린 절묘한 방식으로 혁신을 시도했다.


이렇게 자신만의 스타일을 만들어 나가기 시작한 초창기 시절에 발표한 <레 실피드>는 정말 몽환적인 생명력이 살아있는 작품이다. 19세기 초반 파리 시민들을 열광시켰던 낭만 발레의 정수를 물씬 풍기는 이 작품은 줄거리없이 쇼팽의 아름다운 선율에 따라 무용수들이 공기의 정령처럼 가볍게 움직이면서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사라졌다가 모습을 드러내는 물 흐르는 듯한 표현으로 21세기식의 낭만발레의 기준을 세웠다고 할 수 있다.



포킨은 이 작품의 초연에 출연했던 전설의 발레리나 안나 파블로바를 회상하면서 이렇게 말했다."파블로바는 마치 무대 전체를 날아다니는 것 같았다. 도약이 그리 높지 않다고는 해도 공중에서의 파블로바의 자태는 정말 공중을 날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그녀는 내가 추진하는 개혁의 열렬한 지지자였으며 자신의 이미지에 맞든 안맞든 끊임없이 나를 따르고 있었다."


https://youtu.be/5tkK4RTBG04?si=grBvND8JeH-D6jEE




* 참고 문헌 *

<댜길레프의 제국>, 루퍼트 크리스천슨 지음, 김한영 옮김

<해설이 있는 발레>, 김긍수 지음


https://naver.me/FIoOUM9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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