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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붙지 않는 스티커

어른들은 몰랐을, 나의 작은 반항

by 유화

어른들은 모른다.


어린이집을 졸업한 나는 미술 학원을 다니다가 드디어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처음 가본 학교라는 곳은 참 신기했다. 매주 날을 정해서 학교로 폐품을 가져오라는 것도 신기했고, 등굣길 횡단보도에서 어머니가 녹색어머니 활동을 하는 것을 보는 것도 신기했다. 하지만 신기하고 좋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낯선 환경과 사람들.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낯선 상황에서 친구들 사이에 잘 녹아들고 선생님께 혼나지 않기 위해 나는 정신을 바짝 차렸다. 혹여 부모님께서 걱정하시지는 않을까 적응 잘하는 멋진 아들이 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어른들은 모를 것이다.


우리 외삼촌은 참 재밌는 분이셨다.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뵈었을 때쯤 외삼촌은 내 옷을 보시고는 감탄하면서 말씀하셨다.


오~ 패션 죽이는데~!


그건 무슨 말인지 내가 여쭤보자 내 옷이 참 멋있어서 한 말이라고 하셨다. 그 외에도 외삼촌은 수업 시간에 졸지 말라는 말씀도 하셨다. 사람은 긴장하면 곧잘 실없는 소리를 하기도 한다. 1학년으로 입학하고, 선생님을 만나고 짝꿍과 책상을 둘이서 나눠 쓰는 모든 것들이 새로웠는지 나는 많이 긴장한 것 같다. 멋진 코트를 입으신 선생님을 보며 말했다. 나는 옆자리에 앉은 짝꿍에게 말했다.


오~ 선생님 죽이는데~!


패션이라는 말이 생각이 나지 않았기에 나는 아무렇게나 내뱉었는데 짝꿍은 이게 무슨 말인지 되물었다. 나는 엄청 멋진 옷을 입었을 때 하는 말이라고 짝꿍에게 설명했지만 곧바로 멋지면 멋지다고 말하면 되는 거 아니냐는 친구의 말에 '그러게'라고 말하며 머리를 긁적일 수밖에 없었다. 머쓱해진 나는 외삼촌이 말한 대로 학교에서 과연 조는 것이 가능은 한 것인지를 시험해 보기로 했다. 두 눈을 살포시 감아보았지만 긴장된 상태에 창을 통해 들어오는 밝은 햇살은 눈을 감았음에도 눈이 부셨기에 수업 시간에 조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삼촌이 무심코 했던 말도 흘려듣지 않았음을 어른들은 모를 것이다.


우리 학교에서는 모든 아이들에게 스티커 모음판을 나눠주고 발표를 잘하거나 착한 일을 할 때마다 아이들에게 스티커를 줬다. 작은 스티커들 열 개를 모으면 동상 스티커를 받았고, 이후로 열 개 단위로 은상 스티커와 금상 스티커를 주었는지 아니면 스무 개, 서른 개 차등이 있었는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추후 차등해서 상과 선물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나도 스티커를 열 개 모아서 동상 스티커를 받은 어느 날이었다. 날아갈 것 같이 기쁜 마음으로 모음판에 스티커를 붙였다. 조금이라도 구겨지지 않도록 반반하게 펴서 엄지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그런데 그날 내가 무슨 잘못을 하였는지 지금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선생님께 많이 혼이 났다. 나 같은 어린이는 동상 스티커를 받을 자격이 없다고 다시 가져오라고 하셨기에 나는 아이들 앞에서 훌쩍훌쩍 울면서 스티커를 떼어서 선생님께 드렸다. 그리고 조금 더 혼나다가 이제는 이럴 거면 집으로 가라고 하셨기에 울면서 책가방을 싸고 교실문을 나섰다. 교문을 나설 때쯤 달려온 반장이 나를 데리고 다시 교실로 올라갔다. 선생님은 '왜 죄송하다고 하지 않느냐'라고 다그치셨고 나는 죄송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언제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몰라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집에 가라 하시길래 나간 것이라고 말씀드렸다.


울면서도 '죄송합니다.' 한마디를 뱉지 않는 모습에 더 화가 나셨기에 집에 가라고 말씀하셨고, 그 말대로 가방을 싸서 나가는 모습에 기가 차서 반장에게 나를 데려오라고 보내신 것이었다. 이후 선생님은 주의를 주시고 내게 동상 스티커를 돌려주셨다. 새로 주셨으면 좋았을 텐데 떨어지며 모음판의 종이를 한껏 끌어안고 떨어진 탓에 스티커는 더 이상 끈적임도 없어서 다시 붙지 않았다. 친구가 물풀을 빌려준 덕분에 겨우 모음판에 스티커를 고정할 수 있었지만 찢어진 모음판, 잔뜩 구겨진 스티커와 그 주변으로 번져 나온 찐득찐득한 물풀은 마치 나는 동상을 받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그렇게 동상을 받은 첫날 이후 나는 더 이상 스티커를 모으지 않았다. 그렇다고 학교에서 말썽을 부렸던 것은 아니고, 열심히 해서 스티커를 받으면 그 스티커를 찢어서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으로 작은 반항을 하였음을 어른들은 모를 것이다.


그런데 정말 힘들었던 적이 있었는데 바로 학예회에서 '어른들은 몰라요' 율동을 선보이는 것이었다. 이 망할 율동은 왜 그리 어려운지. 어른들은 모른다는 말처럼, 내가 얼마나 틀리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는지 선생님은 모른다. 내가 틀릴 때마다 노래를 끊고 혼이 나는데 같이 연습하는 반 친구들에게 미안함이 정말 컸다. 오죽하면 집에 와서 어머니께 해도 안되는데 도대체 어떻게 하냐며 울기도 했다. 하지만 그래도 버텼더니 결국 학예회는 다가왔고, 어찌어찌 끝나게 되었다. 또한 선생님께도 언제부턴가 혼나지 않게 되면서 모든 것에는 언젠가 끝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당장의 어려움도 버티고 이겨내면 나아진다며 내 스스로 어려움을 이겨냈고 조금 더 성장했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은 모른다.


꽤나 오랜 시간이 지나서 나도 참 많이 자랐을 즈음 어머니를 통해 알게 된 것이 있다. 다른 집 아이들 부모처럼 선생님께 '인사'를 하지 않았기에 내가 학교에서 많이 힘들어했다고 말이다. 고생하고 우는 나를 보시고는 우리 먹으라고 할머니께서 직접 농사지어 보내주신 참기름과 손수 구워 기름까지 잘 먹인 김을 들고 선생님을 찾아뵈어 인사를 드렸고 그 이후 내가 혼나는 것도 멈추게 되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 말은 나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자수성가를 믿지 않는다는 아놀드 슈어제네거의 말처럼 나 스스로 모든 상황을 견뎌내고 힘든 시간을 이겨낸 것이 아니었다. 아이였던 내가 볼 수 없는 곳에서 나를 도와주셨던 어머니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마음을 쏟을 때 비로소 알게 되는 것들


아이들은 자라서 어른이 되고, 모든 어른은 아이였던 시절이 있다지만 소통을 위해 마음과 정성을 쏟지 않고서는 결코 서로를 알 수 없다. 학교에서 힘들어하는 아들을 위해 김을 굽고 기름을 먹이던 어머니의 마음은 얼마나 그늘이 드리웠을까. 불투명 유리 너머 아른 거리는 실루엣을 보듯 그 마음을 가늠해 볼 뿐, 그 마음을 명확하게 안다고 말하는 것은 여전히 어렵다. 하지만 마음을 쏟으면 그 마음들을 조금씩 알게 된다. 언젠가 자신의 아이를 키우며 마음을 쏟아보면 비로소 어린 시절 자신을 덮어주었던 부모님의 그늘이 그 어떤 양지보다도 밝고, 따스한 곳이었음을 알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어른이 되면 어른이기 때문에 언제나 먼저 이해하고, 먼저 다가가고, 먼저 아이의 마음을 알아줘야 할 것만 같을 때가 있다. 그와 동시에 '그럼 나를 이해해 줄 이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로부터 위로를 받는가'라는 질문이 고개를 드는 날이 올 것이다. 이런 생각이 들면 이미 나보나 훨씬 오래전에 이런 질문을 해왔을 이들을 향해 마음을 쏟자.


나의 부모님. 그들도 누군가의 이해와 위로가 필요했을 것이다. 어른이기에 하지 못하고 접었을 계획들이 있었을 것이고 삼켰을 수많은 말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들의 희생 덕분에 나도 누군가에게 그늘을 덮어줄 어른으로 자랄 수 있었다. 아이가 어른이 되어야 비로소 부모님과 서로를 이해하는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이라면, 좀 더 빨리 되어드리지 못한 아쉬움이 아들의 마음에는 있다.



나의 그늘, 영원한 나의 어른.

이제는 서로를 이해하는 친구로 오래도록 함께 하기를.



어른들이 몰랐던, 어린 날 당신의 노력은 무엇이었나요?

아이였던 당신은 몰랐지만, 이제는 보이는 어른의 마음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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