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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은 나를 낯선 땅으로 데려갔다

마크툽, 이미 기록된 길 위에서

by 유화

중학교 3학년이 된 나는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라는 책을 읽고 깊이 매료되었다. 삶의 의미와 행복을 찾고 더 나아가 이 땅을 살아가는 사명을 발견하고 싶은 열망은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는 청소년에게 이 책은 한줄기 빛이었다.


주인공 산티아고가 여행을 하며 운명과 직관, 사랑과 시련, 행복과 연금술과 같은 인생의 본질적인 가치들을 배우는 것을 보며 나의 내면에 자리한 씨앗도 움트기 시작했다. 진정한 보물은 이미 내 안에 있었고, 그 보물을 찾기 위한 긴 여정은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이자, 성찰과 성장의 길이었음을 알았을 때 나는 전율했다. 이 책을 통해 나는 험난한 파도 속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고 북극성을 바라보며 나아갈 방향을 찾는 고독한 항해사가 된 것 같았다.


책에서는 마크툽이라는 말이 등장한다. '기록되어 있다', '어차피 그리 될 일이다'라는 뜻을 가진 마크툽은 내게 내가 아무리 용을 써도 바뀌지 않는다는 허무함과 무력함을 주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의 소중함을 알게 하였다. 오늘은 바로 연금술사를 읽고 꾼 꿈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꿈속에서 나는 익숙한 내 방 침대에서 눈을 떴다. 오랜만에 개운함을 느끼며 맞이한 아침은 상쾌했다. 하지만 이내 어제와 동일한 하루가 시작된다는 사실이 내 어깨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멋진 책을 읽고, 내 삶에 의미를 찾기 위한 방법 또한 알게 되었지만 여전히 쳇바퀴처럼 도는 일상에서 머물러 있는 내 자신이 답답했다. 변화의 바람은 불어왔으나 이대로 주저앉아 때를 놓친다면 언제 다시 기회가 올지 알 수 없었던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일단 이부자리를 정리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오니 구수한 된장찌개와 계란후라이 냄새가 코끝에 스쳤다. 아빠는 아침식사를 하고 계셨고, 엄마는 이제 막 나와 동생의 밥을 뜨며 우리를 부르셨다.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식탁에 앉은 나를 보고 놀라신 부모님을 바라보며 나도 식사를 시작했다. 여전히 잠에 빠진 동생은 내가 밥을 다 먹기까지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엄마, 아빠. 저는 제 삶의 의미를 찾아 떠나려고 해요.



깜짝 놀라서 무슨 일이냐고 물으시는 부모님께 나는 이집트 피라미드를 보고 오겠다고 말씀을 드렸고, 두 분은 몸 조심히 다녀올 것을 부탁하며 순순히 나를 보내주셨다. 주변은 순식간에 변했다. 내가 어떻게 비행기에 올라탔는지도 모르지만 나는 배낭 하나를 메고 중동 아라비아 반도의 어느 공항에 서 있었다. 배낭을 메고 공항을 나서자 여기저기 수많은 택시 기사들의 호객행위가 있었다. 다짜고짜 내 짐을 들어주겠다는 사람과 나를 잡아 이끄는 사람들 속에서 나는 배낭을 앞으로 메고, 마음을 단단히 먹고 걸었다. 그때 벽에 기대 있던 한 현지인이 나를 발견하고 걸어왔다. 주위는 여전히 소음이 가득했지만 이내 나는 물속에 잠겨 바깥소리를 듣는 것처럼 나를 둘러싼 소음이 먹먹해지다가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왓 뚜유 원뜨? 와이 유 껌 히열?



고요함을 깨뜨린 것은 친근하게 웃으며 건네는 현지인의 말이었다. 알아듣지도 못하는 아랍어 속에서 만난 영어가 반가웠는지 나도 부족한 영어로 현지인에게 설명을 했다.


아이 원뜨 뚜 빠인드 마이쎌쁘!



나름 혀를 굴린다고 하였건만 내 발음은 현지인과 다를 바 없이 똑같았다. 현지인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며 '오께 오께'를 반복했다. 그리고 들고 있던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어갔다.



아이 캔뜨 헬쁘 유 위드 빠인딩 유어쎌쁘.
벗 이쁘 유 돈 해버 쁠레이스 뚜 스떼이, 마이 빼밀리 원뚜 핼쁘 유!



수염이 북실북실한 현지인의 눈은 한없이 맑고 깊었다. 나는 낯선 땅에 이방인이었으며 그는 이곳에서 처음 대화를 나눈 현지인이었다. 서로를 믿을만한 대화의 시간은 갖지 못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그는 나를 몰랐고, 그가 어떤 사람인지 나도 그를 몰랐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가 관광객의 등을 처먹는 현지인 중에 하나일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나는 웃으며 그가 내민 손을 맞잡고 악수를 했다.


아저씨의 이름은 압둘라. 나이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50대였다. 손님을 환영하고 대접하기 좋아하는 문화 덕분인지 압둘라 아저씨의 집에 도착한 나는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식사를 하며 한 가지 재미있었던 것은 아저씨의 아내분께서 음식을 해놓고 아저씨를 부르면 아저씨가 직접 음식을 가져오셨기에 나는 아주머니의 얼굴을 한 번도 볼 수 없었다.


나는 압둘라 아저씨 집에 머무르면서 아저씨의 일을 도왔다. 자동차를 고칠 때 공구나 부품을 가져다 드리는 조수 노릇을 하기도 하고 낙타 떼를 돌보기도 하며, 대추야자 판매를 돕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1년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났다. 어느 날 힘들었던 하루를 보내고 밤이 깊도록 아저씨와 차를 마시며 삶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 나이만 한 아들을 잃고 깊은 슬픔에 빠져 살았던 아저씨는 나를 만나 웃음을 회복할 수 있었다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이야기를 나누던 공간은 ㄱ자로 꺾여 있었는데 모퉁이를 돌면 높은 화분과 항아리로 인해 시야가 닿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그곳에서 아주머니와 딸은 차를 마시며 목소리로나마 우리의 대화에 함께했다.



마크툽! 우리가 만나게 된 것은 이미 예정된 것이었어!



아저씨의 기분 좋은 외침에 나는 잊고 있던 내 삶을 떠올리게 되었다. 안주하는 삶을 살지 않기 위하여 가족들을 떠나 피라미드를 향하여 여정을 떠났는데, 다시 나는 이곳 중동에서 안주하는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간 잊고 살았던 내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한 여정을 다시 떠나기로 마음을 먹었다. 아저씨에게 날이 밝으면 떠나려고 한다는 말을 전하자 한참을 말없이 내 눈을 바라보던 아저씨는 다시 한번 마크툽을 외치며 나를 토닥여 주셨다. 다음날 압둘라 아저씨와 함께 새카만 부르카를 뒤집어쓴 아주머니와 아저씨의 딸이 나를 배웅해 주었다. 배웅을 받으며 배낭을 고쳐맨 나는 이집트 피라미드를 향한 여정을 다시 시작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덧 나는 멀리 피라미드가 보이는 어딘가의 풀 숲에 엎드려 있었다. 피라미드의 모습은 TV에서 보던 모습과 사뭇 달랐다. 마치 영화 미이라2-스콜피온킹에 나오는 정글 같은 풀 숲이 피라미드 부근을 둘러싸고 있었다. 낙타 한 마리가 내 뒤에 꿇어앉아 연신 투레질을 하고 있었고, 옆에서는 내 나이 또래의 소년 아부가 저 위험한 곳에 꼭 가야겠냐고 걱정스러운 어투로 내게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한 무리의 테러리스트 복장을 한 사람들이 하늘을 향해 총을 쏘며 주변을 지나던 사람들을 묶어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부는 아무래도 저들이 천년에 한번 열리며 모든 질병을 낫게 하고 행복을 가져다주는 전설의 후추를 얻기 위해 피라미드 주변을 통제하는 것이라고 했다. 자신도 조상으로부터 전해 들은 것이 전부라서 그 말의 진위여부는 알 수 없지만 지금이 바로 그 천년 후추를 만날 수 있는 때라고 하였다.


무장한 사람들이 정글 속으로 들어간 이후 갑자기 바로 옆에서 천둥이라도 친 것처럼 귀가 먹먹했고 하늘에는 붉은 달이 떠올랐다. 아부는 선택받지 못한 자들이 욕심을 부릴 때 일어날 징조와 비슷하다며 겁을 먹었고 나는 다음날까지만이라도 나를 기다려 달라는 말을 전하고 정글 숲으로 들어갔다.





멀리서 보았을 때 피라미드는 정글 한가운데에 서 있었는데, 막상 정글 안에 들어가 보니 사방을 분간할 수 없었다. 어느 틈에 내 손에는 마체테 한 자루가 들려 있었고, 나는 그 한 자루에 몸을 의지하여 앞으로 전진하고 또 전진했다. 몇 시간을 이동했는지 모른다. 인기척이 들리면 풀숲으로 들어가 웅크리고 숨기를 반복했다. 손에 차고 있던 시계는 언제 먹통이 되었는지 멈춰 있었고 하늘에 떠 있는 붉은 달 아래에서는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내가 무엇 때문에 이런 고생을 하고 있는지 자괴감이 들자 '그냥 압둘라 아저씨 집에나 있을걸. 아니 그냥 우리 집을 떠나지 말걸'과 같은 마음의 소리가 후회라는 이름의 옷을 입고 찾아왔다.


후회하는 마음이 들 때마다 나는 수풀을 향해 마체테를 힘껏 휘둘렀다. 마치 내 앞에 있는 수풀을 베는 것으로 내 안에 들끓는 후회를 베어낸다고 믿는 것처럼 말이다. 결국 피라미드는 구경도 못해봤다. 나보다 먼저 진입했던 용병들도 한 번을 마주치지 못했다. 정글 안에는 동물도 곤충도 없이 오로지 나 혼자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이제는 깔끔하게 포기하고 되돌아 나가야 했다. 아부가 나를 기다리다가 낙타를 타고 떠나는 것을 상상하자 겁이 나기 시작했다. 뒤를 돌아보자 내가 수풀을 베어내며 걸어온 길은 마치 아무도 지나온 적이 없던 길처럼 멀쩡했다. 이대로 길을 잃고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나를 엄습했다. 겁이 났지만 머릿속은 되려 맑아졌다. 삶에 대한 의미고 나발이고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압둘라 아저씨네 가족을 다시 보고 싶었다. 한국에 있는 우리 가족들을 다시 한번 보고 싶었다. 돌아가는 내 앞에 주목보다 큰 용과만 한 열매가 보였다. 건드리면 열매가 뻥 하고 터질 것 같아서 건드리지 않고 돌아갔다. 하지만 그 열매는 계속 내 눈앞에 나타났다. 결국 피해 다니다가 지쳐 칼로 열매를 베어냈다.





열매를 베어내자 붉은빛을 비추던 달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풀 숲 너머에는 정글 밖이 보였다. 나는 서둘러 아부가 헤어졌던 풀숲으로 향했고 그곳에서는 눈이 동그래져서 나를 바라보는 아부를 만날 수 있었다.

아부는 내게 잘 생각했다며 정글에 깊이 들어가지 않고 나온 내 행동을 칭찬했다. 빠르게 낙타를 타고 자리를 뜨며 아부를 통해 듣게 된 사실은 충격적이었다. 바로 내가 정글에 들어갔다가 바로 나왔다는 것이었다. 얼떨떨함이 가시지 않았는데 나는 어느덧 압둘라 아저씨네 집 앞에 서 있었다.


반가움 속에서 나는 문을 두드렸고 우리는 함께 저녁 식사를 하며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내가 겪은 모험을 좀 더 생생하게 전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그 모험을 증명할 수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압둘라는 건강하게 돌아온 것만으로도 신이 나를 지키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문득 내가 불룩한 헝겊 주머니를 메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 주머니 속에 손을 넣자 정글에서 나오기 전에 베었던 커다란 열매가 들어 있었다.



오~! 압둘라! 내가 말했던 열매가 이거예요!



갑자기 압둘라는 자리에서 일어나 열매 앞에 절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전설로만 전해지던 천년 후추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압둘라는 나에게 조심스럽게 이것으로 요리를 해볼 수 있는지 허락을 구했고, 나는 흔쾌히 허락했다. 그러자 먼저 목욕을 해야 한다며 자리를 뜬 압둘라는 얼마나 오래 씻는지 한참이 지나서야 돌아왔다. 다시 한번 열매 앞에 절을 하고 후추알갱이 얼마를 떼어서 주방으로 들어갔다. 아랍의 중년 압둘라가 주방에서 직접 만들어서 가져온 요리는 우리 집에서 자주 먹던 계란후라이였다. 그는 내 앞에서 후추 알갱이가 든 그라인더로 후추를 뿌렸는데 그 모습은 엄숙함 속에서 경건함 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계란후라이를 접시 네 개에 나누어 담았다. 이 순간만큼은 압둘라 아저씨의 아내분과 딸도 함께였다. 맛있게 요리를 먹고, 우리 모두는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을 느꼈다. 다음날, 압둘라는 커다란 후추 열매를 전부 갈아서 가루로 만들어주었다. 나는 절반을 아저씨 댁에 나누어 주고 우리 집을 향해 떠났다.


늘 이렇다. 어떻게 이동했는지 모르게 나는 우리 집 문 앞에 서 있었다. 기쁜 마음으로 나는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갔고, 언제나처럼 가족들은 나를 따스하게 맞아주었다. 너의 삶이 가진 의미를 발견했는지 물으시는 아빠의 말씀에 나는 가방에서 후추 가루가 가득 들어있는 통을 꺼내 흔들며 말했다.



마크툽!






잠에서 깨자 익숙한 천장이 보였다. 바로 내 방이었다. 나는 부랴부랴 노트와 펜을 찾았다. 마치 하나도 잊을 수 없다는 듯, 이 꿈에 대한 기억이 한 조각도 휘발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것처럼 서둘러 꿈 내용들을 노트 위에 휘갈겼다. 책을 읽고 여전히 내 삶은 드라마틱한 변화가 없이 그저 반복되는 일상이었기에 마음에 조급함이 있었던 것을 인정했다. 꿈속에서 그렇게 바랐던 피라미드는 그저 여행을 떠나기 위한 구실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떠났다. 그렇게 어딘지는 모르지만 그곳에서 압둘라 아저씨를 만났고, 아저씨를 도우며 맞이하는 저녁 식탁에서 매일의 행복을 누렸다. 그리고 한 사람의 순례자로서 주어진 삶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길을 찾아 익숙함을 다시 털어내는 경험도 해봤다.


나 외에 다른 존재는 마주친 적이 없는 고요한 정글 속을 헤매고 있을 때 앞길을 막는 무수히 많은 수풀을 쳐냈다. 그 수풀을 쳐내며 앞으로 나아가는 경험은 곧 내 안에 후회와 두려움을 마주할 수 있는 용기가 된 것 같다.


비록 피라미드의 그림자도 볼 수 없었으나 소중한 사람들을 다시 보고 싶다는 열망 하나만을 꿈꿨을 때 눈앞에 나타난 천년 후추를 얻을 수 있었다. 그 열매는 선택된 자에게만 나타난다고 했던 아부의 말을 되새기며, 내 삶의 이야기는 다른 누구도 아닌 선택받은 스스로가 써내려 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후추 열매의 크기는 작지만 수는 어마어마하다. 우리가 모르고 살아왔을 뿐 삶에서 발견하지 못한 귀중한 가치는 얼마나 많았을까. 내가 소중하게 여겨야 할 것은 '무언가를 이룬다는 것'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이루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담은 이야기임을 오른손이 바쁘게 노트 위를 움직이는 동안 나의 마음에 새겼다.


마크툽. 모든 순간의 소중함이여.



단순한 성과가 아닌, 이야기를 남기기 위해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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