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도 좋더라 (선택과 수용)
어느덧 고등학교 진학을 고민해야 할 시기가 왔다. 덕분에 우리들은 모이기만 하면 '어느 고등학교에 지원할 것인지'를 주제로 이야기가 한창이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나는 지난 3년의 시간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초등학교 시절 나는 막연하게 청소년이 된다는 것에 두려움이 있었다. 왜냐하면 맨날 선생님한테 맞는 줄 알았기 때문이다. 이는 미디어를 통해 단편적인 정보를 잘못 받아들인 것에서 기인했는데, TV 채널을 넘기다가 보게 되는 KBS 학교 시리즈에서는 어떻게 된 것이 내가 볼 때마다 엎드려뻗쳐서 선생님께 몽둥이찜질을 당하는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두려움은 곧 따돌림을 겪으며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청소년이 되어서도 친구가 없으면 어떡하지?'라는 더 큰 걱정 앞에서 선생님께 벌을 받고, 혼나는 것은 별 문제가 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이제는 예전과 달랐다. 선생님께 혼나고 엎드려서 맞는 것도 어느 정도 할만했고, 내 주위에는 친구들이 많았다. 선생님의 말씀을 잘 따르는 학생으로서 많은 친구들을 갖는 다른 방법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택한 방법은 선생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친구가 생기기 쉽다는 것이었다. 떠들지 말라고 하실 때 떠들고, 뛰지 말라고 하실 때 뛰며, 장난치지 말라고 하실 때 장난을 치는 모습을 보일수록 내 주위에는 친구들이 모였다. 그렇다고 내가 성적이 엄청 나쁘거나 불량한 학생은 아니었다. 그저 조금 시끄럽고 까부는 학생 정도였을 것이다.
내가 다니던 학교는 사립 남중이었다. 게다가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붙어있어서 하나의 매점과 식당, 운동장을 공유했다. 남자애들만 있는 환경에서 지낸다는 건 생각보다 지루했다. 물론 우정이 있었고, 편한 것도 있었지만 단편적인 것들일 뿐. 늘 칙칙했다. 기도 하고 중학생의 시선으로 본 고등학생 형들의 모습이 썩 매리트가 있어 보이지는 않았기에 이 지겨운 남중을 졸업하면 절대로 남고는 가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다.
고등학교는 정원이 있었고 근거리 또는 무작위 배정이 아닌 원서를 써서 지원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정원이 초과되는 학교가 있다면 정원이 미달되는 학교도 생기기 마련이었다. 정원은 성적순으로 채워졌다. 만일 가고자 하는 학교에 지원자가 몰려 정원에 들지 못한다면 정원 미달인 학교(도심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면, 리에 있는 학교)로 가야 하는 리스크가 있었기에 원서 접수에도 전략이 필요했다. 모든 학생이 가고 싶은 학교를 갈 수는 없는 법. 담임 선생님은 학생의 희망과 성적을 고려하여 그에 맞는 학교에 원서를 써 주셨다. 다행히 내 성적은 인문계 남녀공학을 가기에는 충분했기에 나는 걱정이 없었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다. 나는 선생님 앞에 앉아서 가고 싶은 남녀공학 고등학교 이름을 또박또박 읊었다.
안 돼 인마!
공부를 그리 못한 것이 아니었는데 담임 선생님의 단호한 말씀에 눈이 동그래졌다. 이번에 학생들이 많이 몰려서 그런가 싶어 그보다는 한 단계 낮은 남녀공학을 말씀드렸는데 선생님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셨다.
너는 인마 여자에 빠지면 안 될 녀석이야. 그냥 저기 가.
선생님이 손으로 가리킨 창 밖에는 우리 중학교와 붙어있는 고등학교가 있었다. 아니 성적이 안돼서 못 가는 것도 아니고 여학생들이 있는 학교를 가면 안 되는 이상한 이유로 지원할 수 없다니, 나는 적극적으로 선생님께 항변했다.
쓰읍! 안 되겠다! 다 필요 없고, 어머니 모시고 와!
눈썹을 치켜세우며 단호하게 말씀하신 선생님은 내 이야기를 더 들어보지도 않고 축객령을 내렸다. 계획에도 없던 걸림돌에 나는 당황스러움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다행히 진학을 결정하는 것에 있어서 엄마는 내 의견을 존중해 주셨기에 나는 강하게 의견을 피력하며 엄마에게 신신당부했다.
"엄마, 절대로 선생님한테 설득당하면 안 돼요! 아셨죠?!"
"그래, 엄마만 믿어."
나를 확고하게 지지해 주시는 엄마의 모습에 내 걱정은 사그라들 수 있었다. 드디어 결전의 날. 엄마는 면담 날짜에 맞춰 학교로 향하셨다. 면담 시간은 하교를 하고 난 이후였기에 나는 집에서 엄마를 배웅하며 다시 한번 설득당하면 안 된다고 강조할 수 있었다. 방에 누워서 판타지 소설을 보던 나는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학부모 면담을 마치고 엄마가 돌아오신 것이다. 나는 현관에서 계단을 올라오시는 엄마를 기다렸다. 엄마가 가져오실 승전보를 한껏 기대하며 서있던 나에게 엄마는 숨을 한번 돌리시고 웃으며 말씀하셨다.
"선생님 말씀을 들어보니, 거기도 좋더라!"
망했다. 엄마는 선생님께 철저히 설득당했다. 무슨 이야기가 오고 갔기에 엄마를 설득할 수 있었던 것인지 나는 알 수 없었지만 엄마는 선생님과 면담을 나눈 그 자리에서 고등학교를 확정 짓고 오신 것이다. 저 하늘 너머 어딘가로 내가 그려왔던 고교 생활이 나에게 작별을 고하는듯했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 결정이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내가 걸어 보지 않은 길. 살아 보지 않은 삶이기에 좋다 나쁘다를 말할 수 없지만 적어도 내가 살아온 삶은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웠다. 우리는 삶 속에서 수많은 결정을 내리고 그에 따른 다양한 환경을 마주하며 살아간다. 그런데 같은 상황일지라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마음에 따라 그것을 좋게 여기기도 하고, 좋지 않게 여기기도 한다. '만약에'라는 가정은 우리에게 미련을 남긴다. 미련은 되돌아오지 않는 시간 속에서 지금을 사는 우리로 하여금 현재에 집중하지 못하게 한다. 우리 삶은 결국 모든 최선의 선택이 모여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믿자.
이 글을 쓰다 보니 그 시절 웃으며 말씀하시는 엄마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것 같다.
"거기도 좋더라!"
원하던 선택은 아니었지만, 그로부터 얻은 선물은 무엇이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