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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당근타르트 Oct 27. 2024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병원에서의 긴 여정이 끝나고, 우리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남편의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난 후, 우리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려 노력했다.

매일 아침, 알람 소리에 눈을 뜨며 남편의 건강을 확인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그는 여전히 옆에서 평온하게 잠들어 있었다. 부드럽게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는 모든 것이 괜찮아졌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주말 아침, 우리는 평소처럼 자주 가던 바다 앞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일주일간의 일정을 나눴다. 남편은 여전히 유쾌한 모습 그대로였고, 나는 그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우린 정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살고 있네"라고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때의 기억은 여전히 생생했다. 밤이 깊어지면 가끔씩 떠오르는 불안한 기억들. 그럴 때마다 나는 남편의 손을 꼭 잡았다. 그는 나를 바라보며 따뜻하게 미소 지었다. ‘괜찮아, 나도 그래. 하지만 우린 이겨냈잖아.’     


그 사이 나는 이직을 하게 되었다. 이직을 앞두고 일주일의 여유가 생겼고 둘이서 처음으로 제주도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분명 작년엔 상상도 못 했을 일이었다.

나보다 더 들뜬 그였다. 처음으로 커플 옷을 사고 매일매일 어디를 갈지 계획을 짜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하루하루였다. 그는 집에 있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TV 보는 시간이 많아졌고 당시 장모님과의 일상을 담는 “백년손님”이라는 프로그램의 애청자였다. 마라도의 박서방을 자신에 비유하면서 마라도를 꼭 가보고 싶은 곳으로 정했고 3박 4일이라는 시간을 꽉 채울 맛집과 가볼 곳을 적어두고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4월의 제주는 너무 맑고 투명했다. 하늘은 맑았고 바다는 투명하여 우리가 어디를 가든 우리를 반겨주는 듯했다. 2일은 장소를 이동하여 게스트하우스에서, 1일은 호텔에서 묵으며 제주도 전체를 돌아보는 일정이었다. 그는 어릴 때 이후 처음으로 오는 제주도였고 나도 결혼 전 혼자 온 제주 여행 이후 처음이었다. 함께여서 좋았고, 함께라 낯설었다.

그는 평소 스릴을 즐기는 편인데 그동안 운전도 못했으니 몸이 근질했던지 카트 타기 체험을 몇 번이고 하면서 온전히 지금 이 순간을 즐기는 모습이었다. 사려니숲길을 걸으며 좋은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시기도 하고 유명한 카페에서 달콤한 디저트를 먹으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기도, 해안도로를 따라 드라이브를 하며 두 눈 가득 반짝이는 윤슬을 담아두기도, 목적지 없이 길을 가다 만발한 꽃을 보고 한참 동안 사진을 찍기도 했다. 줄 서는 맛집을 가도 우리는 기다림 없이 들어가고, 차가 아주 많은 주차장에서도 딱 한 자리를 바로 발견하고, 예약한 숙소도 예상보다 너무 만족스러운 곳이었고, 뱃멀미를 하는 나는 마라도 가는 배 안에서 멀미 따위 하지 않았다.

각기 다른 숙소에 이틀 연속 옷을 두고 나온 나는 그에게 아주 호되게 혼이 나고 한 번은 옷을 찾으러 다시 되돌아가고 또 한 번은 숙소에서 택배로 집으로 보내주겠다는 연락을 받아 안도했다. 그렇게 퇴실할 때 다 챙겼다고 당당히 말했지만 역시 그의 보살핌이 필요한 나였다.     


제주도의 풍경과 음식, 그리고 그곳에서의 경험은 우리에게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물들어 가며, 그동안의 힘든 시간을 잊고 새로운 추억을 쌓았다. 그도 나도 한동안 제주에서의 이야기를 끊임없이 하며 좋았던 기억을 간직하려 했다.     


여행에서 돌아와 일상으로 복귀했을 때, 우리는 이전보다 더 강해진 자신을 느꼈다. 이제 우리는 서로에게 의지하며, 더 많은 추억을 만들어 나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밤이 되면 여전히 불안한 기억들이 떠오르지만, 우리는 이제 그것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다짐했다. 앞으로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강해진 우리로서, 평범한 일상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기로. 다른 부부는 알 수 없는 우리만이 느끼는 단단해진 감정이 우리를 감싸고 있었다.     


나는 새로운 직장에서, 그는 새로운 부서에서 익숙한 듯 낯선 새로운 일상을 시작했다.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의 선택으로 우리의 미래를 함께 만들어 나가기 위한 노력을 하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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