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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당근타르트 Oct 27. 2024

그해 우리는

아이가 태어난 그해, 병원에서 남편에게 항암제 투여를 권했다. 아주 작은 종양이 다시 생겨난 것 같다는 진단이었다. 절망적이었지만 절망만 하고 있을 수 없었다. 그렇게 그는 다시 휴직을 시작했다. 이번에는 병가를 낼 수 없어 육아휴직을 신청하게 되었고, 팀 내 최초의 육아휴직자가 되었다. 그와 나는 둘이서 아이에게 온 정성을 쏟을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그는 병원과 조리원에서 퇴원한 나와 아이를 살뜰히 돌보았다. 항암제를 먹는 기간은 5일이었고 4주에 한 번씩 먹는 일정이었다. 그래서 먹지 않는 3주는 온전히 아이를 위한 시간으로 보냈다. 역할 분담을 위해 낮에는 그가, 밤에는 내가 전담으로 아이를 돌보았다. 초보인 나와 달리 그는 조카를 키워본 경험이 있는 '경력직'이었다.

밤에 두세 시간마다 깨서 수유를 하는 게 적응되지 않았다. 분유를 먹이지 않고 모유만으로도 충분했기에 감사했지만 떨어져 잘 수 없어 나는 점점 초췌해져 갔다. 아무리 먹어도 허기가 졌다. 하루 종일 집에만 있으니 ‘아, 이래서 출산휴가는 100일인 거구나’라고 생각했다.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일하러 가고 싶었다. 그래도 이 모든 걸 혼자 감당하지 않아도 되어서, 함께여서 좋기도 했다. 함께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달랐지만 그럼에도 함께여서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상대가 있어서,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아이를 같이 느낄 수 있어서 행복했다.


아이가 조금씩 자라면서 우리는 매일 밖으로 나갔다. 차 안에서만 밖을 바라보다가 조금씩 창문도 열고, 밖으로 한 발 두 발 벗어나 이젠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산책을 시작할 만큼의 시간이 지났다. 어느 날은 집 근처로, 어느 날은 집에서 20분 거리의 공원으로, 또 어느 날은 30분 거리의 바닷가로, 어느 날은 1시간 거리의 교외로, 또 어느 날은 2시간 거리의 타 지역으로 당일치기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셋이서의 시간을 충분히 쓰기 위해 매일매일을 아낌없이 사용했다.

아이의 200일이 다가올 무렵, 나는 카페 운영을 하기로 했다. 집 근처로 마땅한 곳을 발견하였고 순조롭게 오픈 준비를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되기까지 그의 지지가 있었다. 아이는 전적으로 그가 맡아서 볼 예정이었다. 나는 언제든지 매장으로 근무할 수 있는 환경이 되었다. 무엇보다 20대 시절부터 창업을 해보고 싶었던 나였고, 그의 항암제 투여로 둘 다 실직자 아닌 실직자가 되어서 안정적인 생활비가 필요한 터였다. 다시 직장으로 돌아갈 수 없는 나의 최선의 선택이 되었다.


늦가을, 카페를 오픈했다. 아르바이트를 뽑았지만 매일매일 내가 오픈과 마감을 했다. 매출이 얼마나 될지 예상할 수 없어 아르바이트를 많이 뽑을 수도 없었다. 언제 손님이 올지 몰라 오픈 시간과 마감 시간을 조금씩 조정해 가면서 매장의 틀을 잡아나갔다. 예상보다 적은 매출에 풀이 죽어 있으면 그는 늘 나에게 말했다. 

“괜찮아, 뭐든지 당장 잘될 수는 없어. 우리가 시작하자마자 잘되길 바라고 한 게 아니잖아, 결국엔 잘될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그럼에도 많은 돈이 들어갔으니 빨리 대출도 갚았으면 좋겠고 돈도 많이 벌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늘 매출표를 들여다보게 되었다.

오전 매장 오픈을 하고 점심시간이 지나 집으로 돌아와 그와 함께 점심을 먹었다. 그는 아침에 일어나 아이의 아침을 먹이고 간식을 먹이고 한바탕 놀아준 뒤 낮잠을 재우고 난 뒤였다. 아이가 낮잠에서 일어나면 우리는 또 밖으로 나갔다. 아이의 문화센터로, 시댁으로, 친정으로, 바닷가로, 공원으로, 도시로, 시골로 잠시도 집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그렇게 오후 시간을 보내고 나는 다시 마감을 위해 매장으로 돌아갔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 아이를 씻기고 다시 재우고 나면 나도 매장을 정리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다시금 마주한 우리는 아이가 깰까 TV 볼륨을 최대한 낮추고 나는 모유 유축을 하며, 그와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 해가 지나고 1월, 우리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은 제주를 다시 찾았다. 이번엔 둘이 아닌 셋이었다. 챙겨야 할 물건들은 더 많아졌고 아이가 갈 수 있는 곳인지 아닌지 찾아보고 혹시 비행기 안에서 울면 어쩌나 싶었지만 누구보다 잘 해내는 아이였다. 차가운 겨울바람과 맞서 우리 가족은 더없이 행복했다. 동백꽃 군락지에서 셋이서 찍은 가족사진은 한동안 그와 나의 휴대폰 배경화면을 차지하고 있었다. 식당에 밥을 먹으러 가면 나는 아이를 먹이고 그는 나를 먹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에게 버팀목이 되어가면서 점차 완연한 가족으로 자리하는 중이었다.


이런 시간이 점점 쌓이고 쌓여 아이의 첫 번째 생일을 맞았다. 그 사이 그도 더 이상 항암제를 먹지 않게 되었다. 가까운 가족들끼리만 모여 간단한 점심식사를 하기로 했다. 호텔 뷔페를 예약하고 그와 나는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 준비하며 아이와의 돌 촬영으로 기록을 남기기로 했다. 왜 가족끼리만 하냐, 크게 돌잔치해서 여기저기 사람들 많이 부르지, 이런저런 말이 많았지만 가족끼리 작지만 크게 축하해 주고 싶었다. 그저 그동안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자라준 아이와 홀로 힘든 시간을 견뎌낸 그와 이제 울지 않기를 바라는 나를 위해. 

똘똘한 아이는 돌잡이로 청진기와 판사봉을 잡았고 무엇보다 두 집안의 환한 웃음꽃이 되고 있었다.


그해, 우리는 끝없는 도전과 변화를 마주했지만, 그 속에서 서로의 소중함을 다시금 깨달았다. 어려움 속에서도 함께 웃고, 함께 울며, 하루하루를 살아냈다. 그해의 모든 순간은 우리에게 특별한 의미로 남았다.

우리는 서로에게 가장 큰 힘이 되었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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