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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당근타르트 Oct 27. 2024

봄이다. 살아보자

여전히 영화를 좋아하는 그와 주말 영화관 데이트를 앞두고 있었다. 영화 시간을 기다리며 백화점을 이리저리 구경하고, 편의점에서 음료를 사 마셨다. 하지만 점심을 잘못 먹었는지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구토가 나올 것 같기도 하고, 또 아닌 것 같기도 한 이상한 기분이 계속되었다. 그는 영화를 취소하고 집으로 돌아가자고 했지만, 오랜만의 데이트가 아쉬워 괜찮다고 했다. 잠시 앉아 있으면 괜찮아질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다시 일어나 약국으로 가자며 내 손을 잡아끌었다.


약국에서 증상을 설명하자, 약사는 약을 찾다가 이내 돌아서며 물었다.

“근데 임신은 아니시죠?”

“네, 아니에요!”

딱 잘라 말하는 내 옆에 그는 “어? 혹시?” 라며 내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약사는 약을 건네주며 한마디 덧붙였다.

“임산부도 먹어도 되는 약이지만, 혹시 모르니 검사 한번 해보세요”

우리는 혹시나 싶은 마음에 임신테스트기를 같이 구매하고 이내 약을 삼켰다.

영화를 보는 동안에도 증상은 나아지지 않았고, 저녁은 먹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잠이 들었고, 눈을 떴을 때는 이미 그가 출근한 후였다. 그는 문자로 아직도 몸이 안 좋으면 병원에 먼저 갔다가 출근하라는 메시지를 남겨두었다.


씻고 화장대 앞에 앉아 약을 먹으려고 약봉투를 찾으러 주방으로 나가려던 찰나, 약사의 말이 떠올랐다. “임신은 아니시죠?”. 아니라고 했지만, 뭔가 찜찜했다. 확실히 하고 약을 먹자는 생각에 임신테스트기를 들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출근 준비를 마치고 임신테스트기를 확인했다. 두 줄이 선명하게 보였다. 어찌할 바를 몰랐다. 사진을 찍어 이미 출근한 그에게 전송했다. 그의 병원에서도 우리가 신혼부부인 줄 알고 있었다. 그의 복직을 의논할 때도, 우리의 아이를 계획할 때도 늘 진료 시간에 물어봤다. 가능한지, 불가능한지. 의료진의 말에 따라 우리는 아이를 가져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고, 아이를 계획하고 있었다. 다만 나의 이직이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라 조금의 여유를 두고 가져보기로 했는데, 예상보다 빠르게 찾아온 기쁨이었다.


그는 당장이라도 병원으로 가자고 연락이 왔다. 조금 기다렸다가 주말에 가자고 해도 소용없었다. 그는 이미 한 시간 일찍 퇴근을 팀장님께 승인받았고, 소아과 근무 중인 작은누나를 통해 산부인과를 알아보고 있었다. 그의 성화에 못 이겨 나도 업무를 빠르게 끝내고 병원을 이유로 조금 일찍 조퇴했다.

산부인과에서는 확인할 수 있는 것이 혈액검사뿐인 시기였다. 빨라도 5주 차가 되어야 질 초음파를 통해 아기집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음 예약을 잡고 돌아섰다. 왜 이렇게 성화냐며 아직 확실하지 않으니 괜히 이야기하지 말라며 단속을 했다.


5주 차가 되는 시기에 맞춰 병원을 다시 찾았고, 초음파 사진을 받아 들었다. 아주 작은 아기집이 나의 뱃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는 초음파 사진을 받아 들고는 나를 끌어안았다. 초음파 사진에서도 아기집을 확대해 가족들에게 전송하며 나의 임신 사실을 알렸다.

구토가 나올 것 같기도 하고, 또 아닌 것 같기도 한 이상한 기분은 입덧 증상이었다. 임신 사실보다 입덧을 먼저 알게 된 나는 20주가 넘는 시간 동안 지옥 같은 입덧의 시간을 보냈다. 물도 먹을 수 없어 이온음료를 마시고, 밥 냄새를 맡을 수 없어 집에서 밥을 할 수도 없었다. 하루 종일 먹는 게 없어도 계속 구토가 나왔고, 올라오는 것이 없을 정도로 모든 것을 다 토해내며 시간마다 변기에 얼굴을 묻는 일이 자연스러워졌다.

조금씩 배가 불러오고 입덧도 끝이 보였다. 입덧만큼이나 태동도 빠르게 느꼈다. 태동이 느껴질 무렵부터 그는 매일 밤 불러오는 나의 배에 손을 올리고 아빠 태교 동화책을 읽어주었다. “보미야, 아빠야. 오늘 읽어줄 동화책 제목은...” 하루도 빠짐없이 아빠의 목소리를 아이에게 들려주었고, 아이는 보답하듯 더 활기찬 태동으로 대답했다. 그는 항상 병원에 함께했고, 초음파를 볼 때면 누구보다 열정적인 아빠였다. 아이 태교에 좋다는 건 다 찾아보고 해주려고 했다. 뱃속에 있을 때도 이런데 태어나면 얼마나 유난스러울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이의 출산일이 다가올수록 커져가는 고민도 있었다. 바로 양육의 문제였다. 나는 새로운 직장에서 더 뿌리내리고 싶었다. 하지만 이직과 동시에 임신하게 되었고, 출산휴가 3개월만 허용되었다. 그에게 육아휴직을 제안했지만, 그는 이미 병가를 1년 넘게 써서 다른 동기들보다 승진이 늦어졌다며 그래도 이 집의 가장인 본인에게 역할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했다. 일을 그만두는 게 너무 아쉬웠다. 그렇다고 100일 된 아이를 맡길 곳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출산휴가가 끝나는 날을 퇴사일로 정하고 출산 전 직장을 그만두었다.

출산 예정일까지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별다른 몸의 변화가 없어서 그와 나는 가까운 통도사로 산책을 나갔다. 붉은 매화를 보며 예쁜 아이가 건강하게 태어나길 빌었다. 평화로운 그날 밤이 지나고 이른 새벽부터 배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새벽부터 시작된 진통을 참고 8시가 넘어서 병원으로 향했다.


총 7시간이 넘는 진통을 견뎌냈지만 아이의 얼굴이 하늘을 보고 있고 이미 뱃속에서 태변을 본 상태라 아이가 언제 얼굴을 뒤집을지 알 수 없는 상황에 긴급 수술이 결정되었다. 한 번도 예상하지 않았던 긴박했던 시간이 지나고 눈을 떠보니 차가운 회복실 침대 위였다.


그렇게 새로움이 시작되는 봄. 모두가 설렘으로 가득한 그날, 우리에게 삶의 천사가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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