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당근타르트 Oct 27. 2024

괜찮아, 괜찮지않아

오래 기다려야 할 거라는 걱정과 달리 병원에서 예상보다 빨리 연락이 왔다. 나는 회사에 출근하고, 그는 집에 혼자 있는 날이 며칠 지속되었다. 아빠와 오빠가 종종 그를 불러내 점심을 같이 먹었다. 걱정 없는 척하는 그를 안심시키며, 수술 후 먹지 못할 음식들을 챙겨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병원에서 갑작스레 연락이 왔다.

“이틀 뒤 입원하실 수 있으신가요?”

“아, 네! 할 수 있죠.”

“그럼 입원 물품 문자로 안내드릴 테니 준비하셔서 오후 2시까지 입원병동으로 와주세요.”

수술은 입원하고 2일 뒤로 예정되었다. 예상보다 빠른 일정이었다. 하루는 친정에서, 하루는 시댁에서 저녁을 먹으며 수술을 잘 받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돌아오기를 기원했다. 그와 둘이서 입원을 위해 다시 서울행 KTX에 올라탔다.


두 번째 방문에도 낯선 서울대학교 병원은 여전히 크고 복잡했다. 하나의 병동을 찾는 것도, CT실, MRI실을 찾는 것도 바닥에 그어진 여러 색의 화살표를 따라 걷기에도 힘들었다. 여러 의미로 긴장하게 하는 곳이었다.

여러 기초 검사를 받고 입원이 진행되었다. 환자복을 갈아입은 그의 모습이 낯설었다. 수술에 대해 설명을 들으며, 부작용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는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두려웠다. 하지만 그는 이 상황을 겪어내는 사람들 중 가장 담담했다.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선택은 수술뿐이니 당연히 이 모든 걸 감수하고서라도 수술해야죠.”라며 동의서에 서명했다. 의사가 “옆에 계신 분은 누구죠?”라고 물었다. 한 번도 누군가의 보호자가 되어본 적 없던 나는 그의 배우자라는 이름으로 보호자가 되어 나란히 서명했다.

수술을 위해 머리를 깎으러 미용실에 가라는 쪽지를 받았다. 미용실에 가기 전, 우리는 병실에 앉아 마지막 사진을 남겼다. 다시 길러질 머리였지만, 그 순간을 기록하고 싶었다. 몇 장을 찍고 또 찍었다. 병원 내 미용실에서 삭발을 했다. 머리를 깎아주던 미용사가 말했다.

“이렇게 두상이 잘생긴 분은 처음 봐요. 수술 잘 받으세요.”라며 그의 민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자신의 모습이 낯설었지만, 미용사의 칭찬에 그는 금세 기분이 좋아 보였다.

새벽이든 아침이든 저녁이든, 시간에 상관없이 언제든지 어디로 무슨 검사를 하러 가라는 연락이 오면 움직이기 바빴다. 그래야만 수술을 할 수 있었기에, 틈틈이 밥을 먹고 잠을 자며 수술 준비를 했다. 마침내 수술 당일이 다가왔다. 시부모님과 아빠가 병원에 도착했다. 그는 정밀한 수술을 위해 약을 투여받고 햇빛을 피하기 위해 이불을 뒤집어쓰고 수술실 연락을 기다렸다. 열 시가 넘어서 그는 수술실로 향했다.


그가 수술실로 옮겨지고 우리는 수술 대기실로 향했다. ‘대기 중’에서 ‘수술 중’으로 현황표가 바뀌자 마음이 조여왔다. 예상 시간을 알려주었지만, 실제 수술 시간이 더 짧거나 길어질 수 있다고 했다. 시부모님이 먼저 식사를 하고 오시고, 아빠와 나는 직원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아무리 시계를 봐도 시곗바늘이 움직이지 않는 것 같았다.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 가만히 기다릴 수 없어 병원 안을 몇 바퀴나 돌았다. 마음속으로 수많은 상상들이 오갔다. 상상하고 싶지 않았지만, 상상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렇게 하염없이 시간이 흘러 여덟 시간이 지나고 그의 현황표가 ‘회복 중’으로 바뀌었다.


“어? 바뀌었어요! 이제 끝났나 봐요!”라며 주위를 둘러봤다. 많았던 수술 대기실의 사람들이 모두 떠나고 우리만 남아있었다.

회복실에서 한참 동안이나 있던 그는 바로 중환자실로 옮겨질 거라고 했다. 환자가 중환자실로 옮겨졌다는 말을 듣고 얼른 중환자실로 뛰어올라갔다. 중환자실 앞에는 이미 여러 가족들이 대기 중이었고 면회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중환자실 앞 수화기를 들어 재형 보호자라고 말했다. 아직 환자가 도착하지 않았으니 앞에서 대기해 달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가슴을 졸이며 두 손을 마주 잡고 그가 살아오기를 기다렸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들어가는 침대 하나가 있었지만,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수술에 참여했던 처음 보는 의사가 문을 열고 나왔다. 아마도 레지던트인 듯했다.


“수술은 잘 되었고, 지금은 중환자실에서 수술 경과를 지켜볼 거고 내일 오전에 담당 교수님과 면담하실 수 있으실 거예요. 생각보다 수술이 오래 걸려서 힘들었는데, 최대한 종양을 완전히 절제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감사합니다.”

필요한 말만 전하고 다시 문을 열고 들어갔다. 중환자실 면회는 시간이 정해져 있어, 앞에서 무작정 기다린다고 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아빠는 수술 경과를 전해 듣고 KTX 막차를 타기 위해 떠났고, 시부모님은 내일 다시 오겠다고 하시며 병원 앞 모텔로 향했다. 나는 언제 부를지 몰라 중환자실 앞 보호자 대기실에서 쪼그려 앉아 하룻밤을 보냈다.

시간은 어느덧 오전 면회를 앞두고 있었다. 한 명만 정해진 시간에 면회할 수 있어, 시부모님은 나를 먼저 들여보내 주셨다. 그의 베드를 찾아갔다. 지친 기색이 가득한 채 곤히 잠들어 있는 그를 발견하고 깨우지 못한 채 주변을 서성거렸다. 간호사가 다가와 “재형 님, 재형 님”하며 어깨를 톡톡 내리쳤다. 그는 살며시 눈을 뜨고 두리번거렸다. 간호사가 묻는 말에 대답하며 나를 찾아낸 그가 눈으로 말했다. ‘나 괜찮아. 너무 걱정하지 마. 진짜 괜찮아’라고 말하는 반짝이는 눈에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보호자분, 옆에서 식사 챙겨주세요.”

“네? 벌써 식사가 가능해요?”

“네, 가능합니다. 아침 식사하시고 이제 일반 병실로 옮기실 거예요.”

그의 옆에서 죽을 먹여주고 있을 때 담당 교수님이 그를 찾아왔다.

“재형 님, 괜찮으세요?”

“네, 괜찮습니다.”

“지금 식사하시고 괜찮으시면 이제 일반 병실로 옮기면 되겠네요.”

아니 이렇게 빨리?라는 생각에 “교수님, 이렇게 빨리 옮기나요?”라고 물었다.

“그럼요, 식사 가능하시면 중환자실에 계실 이유가 없어요. 일반 병실 가서 회복하시면 돼요.”


그에게 부모님이 밖에서 기다리고 계신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이따가 다시 만나자는 이야기를 나누며 중환자실을 나왔다. 나오는 길 우물쭈물하던 나를 도와주던 간호사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했다.

“어머, 근데 두 분 무슨 관계예요?”

“부부예요”

간호사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진짜요? 결혼 엄청 빨리 하셨네요. 두 분 너무 예뻐요! 꼭 다 나으실 거예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너도 나도 한 마디씩 인사를 보태주었다.

“감사합니다.”

오랜만에 웃는 나의 얼굴이 출입문 사이로 비쳤다.


이내 일반 병실로 온 그를 시부모님께서 맞아주셨다. 수술 부작용으로 하반신 마비가 올 수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시아버지는 그의 다리가 무사한지 제일 먼저 체크하셨다. 누워있는 그의 발바닥을 긁어댔고 그는 움찔움찔하다가 끊임없이 긁어대는 통에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내 아버님은 “아이고 다행이다”라고 속삭이셨다.

오히려 중환자실에서의 모습보다 일반 병실에서 그는 더 힘들어했다. 갈수록 통증이 더 심해지는 듯했다. 하지만 병동에서 꼭 매일 세 번은 운동을 해야 한다고 보호자에게 알려주었고 시부모님은 “우리말은 안 듣는데 네 말은 잘 들으니 네가 운동을 시켜줘”라고 하셨다. 그는 힘들어했지만 병원 복도를 걸으며 우리가 결혼은 언제 했는지, 우리가 언제 처음 만났는지 등등의 이야기를 나누며 자신이 멀쩡하다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머리에 핀셋을 꽂고 나온 그는 며칠이 지나 핀셋 제거를 하고 실밥으로 꿰매는 시술을 했다. 병동을 관리하는 레지던트는 너무 많은 업무 탓에 늘 시큰둥했다. 그가 아프다고 표현했지만, “원래 아픕니다”라며 계속 시술을 이어갔고 그는 몇 번의 아픔을 외치다 이내 기절했다. 레지던트는 시술을 끝내고 “꽤 아프셨겠네요”하고 휙 돌아나갔다. 그를 일으켜 세워 다시 병실에 눕히고는 차트를 적는 데 여념 없는 레지던트를 원망스럽게 쳐다봤다.


꾸준히 몸을 움직여야 회복이 빠르기에 하루 세 번 병원 복도를 걷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과 중 하나였다. 하지만 아픈 그는 힘들어할 때가 많았다. 그러면 레지던트는 어김없이 “보호자가 환자를 통제 못 하면 어떻게 하십니까”라며 나를 쳐다봤다. “저도 어쩔 수가 없잖아요”라고 한숨을 내쉰다. 그리고 잠시 정적이 흐른다. 정말 궁금했지만 한 번도 물어보지 못했던 말을 이참에 물어본다.

“정말 궁금해서 여쭤보는데요. 그런데 이 병은 왜 걸리는 거예요?”

“그건 모르죠. 지금 저도 내일 걸릴 수 있고 그냥 재수 없으면 걸리는 겁니다”

이내 그 대답이 나를 찔렀다는 것을 알아채곤 글썽이는 나를 지나쳐 그에게 가서 “보호자분이 힘들어하세요. 운동하셔야 합니다”라고 말하고는 사라졌다.


드라마에서만 보던 병원 계단에 숨어 매일 울었다. 아침을 먹이고 식판을 들고 나와 계단에 앉아 울었다. 점심에 약을 챙기고 나서 그가 낮잠을 자면 혼자 밖으로 나와 벤치에 앉아 울었다. 어둑어둑해지는 밤이 오면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울었다.

나는 혼자 우는 시간이 늘었고, 그는 하루가 다르게 좋아졌다. 일주일을 다 채우지 않고 수술 5일 만에 퇴원을 하게 되었다. 벌써 퇴원을 해도 되는 걸까 싶었지만, 병원에서는 더 이상 해줄 처방이 없다고 했다. 약을 챙기고 다음 진료에 맞춰 예약을 잡은 뒤, 서둘러 퇴원을 위한 준비를 하였다.


그해 5월, 그의 머리에는 수술 자국이 남았고 나의 마음에는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남게 되었다.

수술을 하고 이제 제대로 된 병명을 마주하는 날이 왔다. 종양 검사 결과, 그의 병명은 뇌종양 3등급에 해당하는 역형성 성상세포종이었다. 악성이라는 결과는 불행이었지만, 악성 중에서도 최악은 아니라는 점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종양을 모두 절제했다고는 하지만, 보이지 않는 미세한 종양이 남아 있을 수 있어 추가 방사선 치료가 필요하다고 했다. 매일 받아야 하는 방사선 치료는 집 근처 병원에서 받기로 결정하고 병원을 나왔다.

방사선 치료를 위해 매일 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병원에 한 달 넘게 다녔다. 5월에 수술을 받은 그의 최종 치료는 7월이 넘어서야 끝이 났다.     


그는 하루가 다르게 괜찮아졌지만 내 마음의 상처는 여전히 괜찮지 않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