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서울대학교 병원 진료를 마치고 꼬박 이틀을 방 안에만 있었다. 그를 볼 용기가 생겨나지 않았다. 그냥 내가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렇게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의 CD를 챙겨 들고 새벽부터 또다시 KTX를 탔다. 분당차병원에 뇌종양 명의를 찾아 나섰다. 씩씩해지기 위해 노력했지만, 장소에 상관없이 터져 나오는 눈물을 막아내느라 휴지가 늘 손에 쥐어져 있었다. 차병원에서도 똑같았다. 세계 어디를 가도 치료할 수 없다고 했다. 이제 곧 죽는 일만 남았다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 아무것도 없었다. 첫돌까지 아빠와 지내던 아이는 아빠와 떨어지기 시작하면서 종종 아빠를 찾더니 이제는 아빠의 존재를 잊은 듯했다. 그가 지쳐가고 있을 때 아이는 하루가 다르게 자라고 있었다. 세 살을 맞아 첫 어린이집 입학을 하게 되었다. 일주일간 엄마가 같이 오전 시간 동안 어린이집에서 생활하며 적응하는 시간을 가지고 점심시간이면 이른 하원을 하였다. 그날도 아이와 같이 하원해 차를 타고 막 어린이집을 나서고 있을 때 어머님께 전화가 왔다.
“지금 병원에 와야 할 것 같아. 재형이가 오늘이 마지막이 될 것 같다고 한다.”
“네?”
“방금 의사가 와서 그렇게 말하네, 얼른 와라.”
“아니 진짜예요? 서울대에서는 3개월은 그래도...”
“아니야, 서둘러라.”
전화를 끊고 엄마에게 아이를 맡기고 바로 병원으로 향했다. 가면서 작은누나에게도 전화했다. 내가 물어볼 사람은 작은누나뿐이었다.
“형님, 어머님이 전화로요...”
“안 그래도 나도 전화받았어. 괜찮아. 별일 없을 거야, 조심해서 가봐.”
무슨 정신이었는지 병실에 도착하니 온 가족 친지들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를 보자마자 어김없이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분명 어제도 나와 보미를 두고 절대 먼저 가지 말라는 말에 두 눈을 크게 깜빡이던 그였다. 모두가 그를 보며 내가 왔다고 이야기했다. 그의 귀에 대고 “오빠, 나 왔어”라고 말했다. 다들 나에게 좋은 이야기를 해주라고 했다. 그의 심박수는 불안정했고 나는 그의 팔과 다리를 붙잡고 주물렀다. 둘이 인사를 나누라며 모두 자리를 피해 주었다. 큰 병실에 둘 뿐이었다.
“오빠, 진짜 가는 거야? 너무 힘들고 답답했지? 그동안 고생 많이 했어. 오빠는 나랑 결혼해서 좋았어? 난 좋았어. 나 많이 사랑해 줘서 고마웠고, 보미 진짜 잘 키워볼게. 오빠가 우리 잘 지켜봐 줘, 그리고 잘 지켜내 줘”
내 말이 그의 귀에 닿았는지 그는 눈을 깜빡였고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흘러내린 눈물을 닦아주며 “너무 걱정하지 마”라고 이야기한 뒤 그의 입술에 나의 입술을 닿게 했다. 그리고 볼을 만져주었다. 살며시 웃어 보이는 그가 보였다.
곧이어 아빠와 엄마가 보미를 데려왔다. 보미에게 “아빠 이제 잘 가”라고 인사해 보라고 했다. 마냥 사람들 많은 틈에 이게 무슨 일인가 싶은 아이는 어리둥절했다. 그렇게 그는 모든 가족과 인사를 나누며 마지막을 함께했다.
장례 절차는 빨랐고 시부모님을 중심으로 모든 결정이 이루어졌다. 내가 결정한 것은 그의 영정사 진 뿐이었다. 최대한 그가 좋아했던 사진, 그가 잘 나온 사진으로 해주고 싶었다. 휴대폰을 뒤지고 뒤져 만삭사진을 찍으러 스튜디오에 갔을 때 그가 혼자 찍어둔 사진을 골랐다. 하얀색 재킷을 입고 꽃을 한 아름 들고 웃고 있는 사진. 모두가 그 영정사진을 보고 너무 멋진 그를 아까워했다. 장례식장 문 앞에는 그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이제 그 밑으로 그의 보호자가 아닌 미망인이라는 이름으로 나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미망인이라니... 미망인은 아직 죽지 않은 사람이란 뜻으로, 남편을 따라 죽지 않은 과부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한다.
제일 먼저 그의 친구가 장례식장을 뛰어들어왔다. 낮에는 시부모님의 성당에서 저녁에는 그의 친구들과 직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장례식장을 꽉 채웠다. 나의 지인들에게는 소식을 전할 용기가 생겨나지 않았다. 나는 그가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을 정면으로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가장 친하다고 생각한 몇몇의 친구에게만 문자를 보냈다. 정형화된 부고 문자를 보낼 수 있을 정신도 용기도 없었다. 그가 사라진 동시에 나도 사라진 것 같았다.
3일간 밥을 먹지 않은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3일 굶는다고 죽는 건 아니니깐. 계속 절을 하고 인사를 했다. 방에 들어가서 잠시 쉬라는 말도 들리지 않았다. 언젠가는 마를 것 같았던 눈물은 마르지도 않고 끝없이 흘러내렸다. 내가 나인 것이 싫었다. 이 자리에 내가 있다는 것이 믿을 수 없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는 것인지, 나는 왜 계속 하염없는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인지, 왜 내 옆에는 그가 없는 것인지, 현실을 도피하고 싶어 수없이 많은 생각의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를 괴롭혔다.
어떻게 흘렀는지 벌써 그가 한 줌의 재가 되어 홀연히 사라져 버려야 하는 시간이 되었다. 그는 천주교 납골당에 자리를 잡았다. 부모님이 먼저 그에게 절을 한 뒤 친구들과 가족들이 뒤이어 인사를 나눴다. 마지막으로 내 차례가 되었다. 내가 인사를 하고 나면 그와 나 사이에 벽이 세워지고 만다. 최대한 미루고 싶었다. 한참을 엎드려 일어나질 못했다. 말로는 잘 가라고 인사했지만 내 마음은 그렇지 못했다. 그와 정말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헤어지는 길, 어둑어둑 쏟아졌던 빗줄기가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천천히 그 자리를 떠났다. 그와 함께했던 모든 순간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 그리고 사랑. 그 모든 것들이 한순간에 뒤섞여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난 그렇게 33살에 미망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