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다시 복직했다. 복직하지 않았으면 했지만, 결혼 후 자신의 갑작스러운 수술과 치료로 인해 제대로 직장을 다니지 못해 가계에 보탬이 되지 못했다는 스스로의 자책이, 나에 대한 미안함이 복직의 이유였다. 하지만 그 복직도 얼마 가지 못했다. 병원 정기검진으로 그와 누나가 서울대학교 병원에 간 날이었다. 분명 진료 시간이 지났는데도 연락이 되질 않았다. 다른 날이었으면 진료가 끝나자마자 먼저 연락이 왔을 것이다. 하지만 그날은 오후가 다 되어도 아무리 전화를 해도 받지 않았다. 무슨 일이 생겼음을 직감했다.
‘집에 도착해서 이야기하자’는 문자만 남겨둘 뿐이었다. 무슨 일인지 조마조마했다. 그가 복직을 하면서 아이를 친정에 맡기고 매장으로 출근하고, 오후가 되어 퇴근하면서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가 그가 퇴근해 오면 같이 저녁을 먹는 일상을 보내는 중이었다. 어김없이 아이를 데리러 친정에 가니 부모님 역시 그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만 데리고 나와 늦은 저녁까지 그를 기다렸다. 그는 시댁에 들렀다가 오는 길이라고 했다.
“다시 재발이 됐대. 그래서 수술해야 한다고... 오늘 입원에 필요한 검사도 하고 왔어. 엄마 집에 가서 수술하고 엄마 집에서 지내기로 이야기하고 왔어.”
“아니, 그게 무슨 말이야? 그래, 재발돼서 다시 수술할 수 있지. 수술하면 되지. 근데 왜 엄마 집에서 지내겠다고 상의한 건 뭐야? 그걸 지금 나한테 통보하는 거야? 먼저 연락해서 알려줄 수도 있었잖아. 이렇게 계속 기다리게만 하고... 나 혼자 지금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는지 알아?”
“미안해서 그렇지. 결혼해서 지금까지 내가 한 건 아픈 것밖에 없잖아. 이제 장인어른 장모님께도 드릴 말씀이 없다. 뵐 면목도 없고... 그리고 여보 카페도 해야 하고 보미도 봐야 하는데 나까지 집에 있으면 힘들어서 안 돼. 난 그냥 엄마 집에 가서 있을게. 여보가 나 보러 오면 되지, 다들 그렇게 상의하고 오는 길이야.”
“나는 이제 당신 일에 어떤 결정권도 없는 거네, 그냥 그렇게 가족들끼리 결정했으니 군말 없이 따르면 된다는 거네, 나한테는 어떤 말도 안 해주고?”
“우리는 여보한테 너무 미안하니깐.....”
“지금 이 시간까지, 병원에서부터 지금까지 그 모든 게 나에 대한 배려였다고? 나를 진짜 가족으로 생각 안 한 건 아니고?”
“아니 왜 말을 그렇게 해? 나도 힘들고 여보도 힘드니깐 엄마 도움 받자는 건데”
“............”
알고 있다.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는 걸, 최선의 선택이라는 걸.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애써 감추며 매장 마감을 위해 도망쳐 나왔다.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매장엔 부모님이 와 계셨다. 그의 병원 소식이 전과 다르다는 걸 부모님도 예감하셨다.
재발과 재수술의 소식을 전했다. 눈물이 또다시 터져 나왔다. 내 눈물은 마를 새 없이 더 깊고 진해지는 중이었다. 부모님은 첫 수술처럼 잘 견뎌내서 아무 일 없는 것처럼 다시 일어설 김서방이니 자꾸 우는 모습은 보이지 말라고 했다. 제일 속상한 건 김서방일 거라며.
그렇게 그는 다시 휴직을 했고 다시 수술대에 올랐다. 당연히 내가 같이 가는 거라 생각했는데 시댁에서 자꾸 만류했다. 매장에 근무할 직원도 없고 아이도 있는데 누나들과 시부모님이 갈 테니 걱정하지 말라며 상황 보고 자주 해주겠다고 했다. 같이 가고 싶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도 극구 만류했다. 아이 옆에 있어줘야 한다며 잘하고 오겠다며 인사했다.
수술 직전 그와 통화를 했고 그는 전에는 한 번도 말한 적 없었던 두통을 호소했다. 빨리 수술받았으면 좋겠다는 말도 했다. 그때 알았다. ‘아, 난 그에게 든든한 나무가 되어주지 못했구나. 그는 나에게 아픔을 숨기고 있었구나.’ 수술실로 들어갔다는 연락을 받고 나는 절에 가서 기도했다. 근처 유명한 절이란 절은 다 갔다. 그리고 계속 기도했다. ‘제발 수술 잘되게 해 주세요. 이제 아프지 않게 해 주세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뿐이었다.
그런데 예상보다 너무 이른 시간에 수술이 끝났다는 연락이 왔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왜 이렇게 빨리 끝났어요? 다 제거 못했다고 해요? 지금 어떤 상태예요?”
궁금한 게 많았지만 내가 원하는 답은 들을 수 없었다. 내가 같이 갔어야 했는데 후회했다. 그는 첫 수술과 마찬가지로 5일째 퇴원하고 시댁으로 돌아왔다. 겉보기엔 첫 수술과 다름없는 모습인 것 같았다. 그리고 아빠에게 전화해 ‘수술 잘하고 왔다’는 인사도 드렸다고 했다. 이번에는 서울에서 방사선치료와 항암치료를 같이 받기로 결정했다. 근처 요양병원에서 어머님과 생활하며 2차 치료를 받았고 나는 매주 서울을 다녀왔다. 그는 마지막 희망으로 체질요법까지 시작했다. 두 번째 수술을 통해 그는 ‘교모세포종’을 진단받았다.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그 진단명이었다. 점점 그는 쇠약해져 갔다. 혼자 걸을 수는 있었지만 하지에 힘이 빠지기 시작했고 언어 기능도 떨어지고 있었다.
모든 치료를 마치고 다시 돌아온 그는 계속 시댁에 머물렀다. 아이와 나는 친정에 머물렀다. 우리 가족이 머물던 집은 텅 빈 집이 되었고 그렇게 이산가족이 되었다.
어느 순간 하지에 힘이 빠져 결국 혼자서는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너무 급격하게 변화하는 모습이 당황스러웠다. 서울대학교 병원에 아무리 전화해도 예약된 진료일 외에는 진료를 볼 수 없다는 답변뿐이었다. 정 급하면 응급실로 방문하라고 했다. 그는 온몸에 힘은 빠지고 있지만 눈빛은 그대로였다. 나를 바라보는 눈빛, 아이를 바라보는 눈빛. 나는 그 눈빛에서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믿음을 보았다. 분명 그랬다.
어느 날 시어머님이 나를 따로 불렀다.
“우리 이제 편히 보내주자. 그렇게 마음먹자.”
“어머님,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병원에서도 그러고.. 여기저기 알아보니 힘들 것 같다고 하는데 괜히 우리가...”
“아니요, 전 아직 어머님보다 적게 살아서인지, 자식이 아니라 남편이라 그런지, 아직 너무 젊어서인지, 아이 때문인지 어째서인지 모르지만 이렇게 보낼 수는 없어요. 그런 말씀 안 하셨으면 좋겠어요.”
“나도 자다가도 눈물이 나고 너무 아까운 내 자식인데.... 우리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상황까지 온 것 같아”
“아니요, 사람 사는 게 다 의지로 되는 거고 다 이겨낼 수 있어요. 분명히 이겨내고 괜찮아지는 날 올 거예요. 아직 보미가 이렇게 어린데 어떻게..........”
잠시 어머님과 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서로의 눈물을 닦아냈고, 어머님의 말이 곧 닥쳐올 일인 것만 같아 불안감에 휩싸인 나는 먼저 자리를 떠났다.
지금 나에게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아이를 재우고 옆에 누워 기도했다. ‘제발 우리 아이에게 아빠를 뺏어가지 말아 주세요.’
12월 31일, 작은누나에게서 연락이 왔다. 출근을 위해 집을 나서던 중이었는데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의 호흡이 고르지 못해 응급실에 가려는 중이라고 했다. 사실 전날 가족들에게 너무 답답해서 한소리를 하고 난 뒤였다. 왜 아들이, 동생이 이렇게 갑자기 나빠지고 있는데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느냐고. 다들 그냥 이렇게 나빠지다 죽는 거라고 생각하느냐고 말이다. 모든 가족들이 그를 위해 모든 수고를 하고 있는 걸 알고 있지만 그저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는 생각에 원망을 쏟아낸 것이었다. 이왕에 가는 거 서울대학교 병원 응급실에 간다고 했고 나도 바로 뒤따라가겠다고 했지만 이번에도 역시 먼저 가보고 연락 줄 테니 기다리고 있으라고 했다. 그는 젊은 만큼 수술도 잘되었고 치료의 성과도 좋았다. 그래서 회복도 빨랐고 일상을 누리는 데도 몇 개월의 시간만 걸렸을 뿐이었다. 젊다는 것, 그건 치료도 빨리 되지만 암세포의 확장도 빠르게 된다는 뜻이었다. 몇 달 사이 그에게 새로운 종양이 또다시 생겼고 그것이 온몸에 힘을 빠지게 하는 원인이 되었던 것이었다. 나중에서야 전해 들은 이야기지만 그날 응급실에서 첫 수술에 참여했던 의사가 지금까지 병의 호전과 전이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이야기를 전했고 그 역시 듣게 되었다고 했다. 어머님과 둘이서 소리 내어 펑펑 울었다고 했다. 응급실에 온 수많은 사람들을 신경 쓰지 않고 소리 내 울었고 모두들 그를 걱정했다고 했다.
나에겐 당시 이 이야기는 전해주지 않았고 그저 더 나빠졌다며 새해 첫날부터 좋지 않은 이야기를 듣게 해서 미안하다고만 했다. 뒤늦게 알게 된 그날의 이야기는 나를 더 그의 가족으로부터 한발 멀어지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렇게 그는 이제 계속 누워있기만 했다.
혼자 그의 진료일에 맞춰 서울대학교 병원으로 향했다. 그날은 나의 생일이기도 했다. 주민등록등본과 신분증을 챙겨 그와 나의 사이를 증명하고 진료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들은 첫마디는 ‘이제 병원에서 해줄 수 있는 치료는 없습니다. 호스피스에서 남은 시간 편히 지낼 수 있게 도와주는 게 최선의 방법입니다’였다. 억울했다. 지금까지 병원에서 하라는 대로만 했는데 원인도 없는 이 병에 걸린 것도 너무 억울한데 병원은 이제 해줄 게 없다니. 이제 죽는 것만 남았다니. 그리곤 ‘다음 진료는 없습니다’라는 말을 덧붙였다. 뭔가 내가 더 물어보려고 하면 하소연은 들어줄 시간이 없다는 듯 밖에 간호사와 이야기하라며 나를 내쫓듯 ‘다음 환자 들어오세요’라고 했다. 부모에게 버려진 아이가 된 듯했다.
뭔가 한줄기의 희망이라도 있을 거라 믿고 싶었지만 그것마저 싹둑 잘린 기분이었다. 혼자 KTX를 타고 내려오는 길 멈추지 않는 눈물을 숨길 수 없었다. 좌석 가득 사람들이 앉아 있었지만 나도 모르게 엉엉 소리가 났다. 아마도 그가 소리 내 울었던 그 울음과 비슷한 의미였을지 모르겠다.
그에게 기적이 오길 바란 건 나의 헛된 바람이었을까. 이유도 없이 찾아온 병이었으니 이유도 없이 한순간에 사라져 주길 바랐다. 나의 생일에 듣게 된 남편의 시한부 판정이라니, 선물처럼 우리 가족에게 기적의 순간이 찾아올 것이라 기대한 나에게 실망했다.